등장인물과 심리
올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 채식주의자(한강)는 연작 소설으로 폭력에 대한 거부와 혐오 그리고 죄책감을 드러낸 채식주의자, 인간의 욕망을 그린 몽고반점, 인간의 죽음에 대한 나무 불꽃 등 총 3편의 단편 소설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소설은 각기 다른 시점으로 쓰여져 있으며 남편, 형부, 그리고 언니 인혜의 시선으로 영혜의 삶을 들여다 본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다. 채식주의자의 등장인물들 또한 영혜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유기적이고도 연쇄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소설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영혜, 인혜, 그리고 남자들.
■ 영혜
열여덟살때까지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고 자랐을 정도로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라며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길러 왔다. 어느 날, 자신을 물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 고깃국으로 상에 올라왔던 개에 대한 꿈을 꾸며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 잔인한 도축 방법이나, 종교 혹은 다이어트의 이유가 아니라 어렸을 적 개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부터 기인한 채식으로 일반적 채식주의자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폭력적인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영혜를 비롯한 세 남매는 폭력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각기 달랐다. 남동생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했고, 언니인 인혜는 바쁜 어머니 대신 아버지의 술국을 차려다 바치며 폭력의 대상으로부터 제외됐었다. 오직 영혜만이 뼛속 깊이 아버지의 폭력을 미련히도 버티곤 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외모, 마른 체구의 평범한 그녀는 평범 이상을 바라지 않는 남편에 맞추어 매일 조식을 챙겼고, 주말에 놀러가자고 조르지도 않았으며, 만화책 말풍선에 대사를 넣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도 보태는 보통의 존재였다.
그 꿈을 계기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영혜는 채식, 자해, 형부와의 관계 등 비이성적이고 비현실적인 일을 저지른다. 정신병원과 요양병원을 전전하며 더욱 고립되어 아예 식물이 되고자 물과 햇빛 이외의 것을 거부하는 영혜. 가족들마저 그녀에게 냉담해지고 언니만이 곁에 남는다.
■ 인혜
참기, 속으로 삭히기, 이겨 내기. 인혜는 성실과 책임으로 대변되는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홀로 상경하여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인혜는 어딘가 지쳐보이는 남편에게 이끌려 결혼까지 하게 된다. 예술을 하는 남편은 돈벌이가 변변치 못해 인혜가 작은 화장품 가게를 차려 생활을 꾸려간다.
두평 남짓한 구멍가게만 하던 화장품 가게는 그녀의 성실함과 사근함을 바탕으로 그 규모를 늘려갔고, 제법 평수가 큰 집을 얻어 이사까지 하게 되었다. 그녀는 묵묵히 삶의 역할을 수행했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 그리고 든든한 장녀로서의 부담과 책임.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사랑 없는 결혼, 그리고 성실의 가면을 쓴 비겁함으로 부터 발생된 죄책감 등이 또아리를 틀어 그녀를 극심한 불면증과 우울증에 빠지게 만들었고, 자살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아픈 동생과 더불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때문에(혹은 덕분에) 나무 불꽃의 환상을 보고 다시 살기로 결심한(혹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놓였던) 그녀.
성실함의 관성으로 다른 가족들이 외면해 홀로 남은 영혜의 수발을 든다. 되풀이 되는 거식증세로 토혈을 하고 발작을 일으킨 영혜를 서울의 큰 병원으로 이송하는 구급차 안에서, 다시 한 번 타오르는 나무 불꽃을 가만히 노려 보는 인헤. 영혜의 죽음에 대한 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 두 자매의 아버지
가부장적인 장인은 지난 오년간 들어본 적 없는 사과조의 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배려의 말 따위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아내는 열여덟살까지 종아리를 맞으며 자랐다고 했다. - 38p
평생의 노동으로 단련된, 단단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은 뒷모습 - 48p
월남전에 참전하여 무공 훈장까지 받은 군인 출신의 가부장적인 인물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엄격한 규율을 타인에게도 적용하여 억압하고 강요하며, 통제하려 든다. 어머니는 자신도 피해자가 될까봐 독재를 방조하고, 어느 덧 조용한 동조자가 되어 있다.
이러한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은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된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혜의 다리를 문 개를 잡아 동네 잔치를 연 아버지. 그 때의 죄책감으로 영혜는 폭력으로 대변되는 고기(육식)를 거부하게 된 것이다. 친정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억지로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며 폭력을 쓰자, 영혜는 자해를 하여 병원으로 실려가기에 이른다.
■ 인혜의 남편(영혜의 형부)
형 별명이 오월의 신부였잖아. 의식있는 신부. 강직한 성직자 이미지......나도 그걸 좋아했던 건데. - 135p
그는 고지식해 보일 만큼 올곧은 성격의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든 과장이나 아첨의 말을 하지 못했다. - 161p
강박에 가까운 도덕 관념을 지닌 올곧고 강직한 성격의 인물. 학창 시절 별명이 신부(사제)였을 정도로 고지식한 원리 원칙 주의자인 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생에 회의를 느낀다. 탈모가 진행되고 조금 씩 배가 나오기 시작하자, 야구모자로 머리를 가리고 뱃살에 신경쓰는 등 노화를 두려워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서도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처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젊음에의 욕망을 처제에 대입하여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육체에 대한 이미지를 직접 실현하고자 한다.
■ 영혜의 남편
언제나 나는 과분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나보다 두세살 어린 조무래기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을 했고, 자라서는 넉넉히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에 지원했으며, 내 대단찮은 능력을 귀하게 여겨주는 작은 회사에서 내세울 것 없는 월급이나마 꼬박꼬박 받을 수 있다는 데 만족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그녀와 결혼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예쁘다거나, 총명하다거나, 눈에 띄게 요염하다거나, 부유한 집안의 따님이라거나 하는 여자들은 애초부터 나에게 불편한 존재일 뿐이었다. - 10p
그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그의 동서가 마치 망가진 시계나 가전제품을 버리는 것처럼 당연한 태도로 처제를 버리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ㅁ유난히 이마가 좁고 하관이 빨라 강퍅해 보이는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동서의 얼굴 - 86p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 외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 - 105p
어렸을 때 부터 자기보다 못난 열등한 존재를 거느리며 골목대장 노릇을 했고, 그저 그런 대학, 그저 그런 회사, 그리고 평범한 아내와 결혼을 하여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살고자 한다. 과분한 것을 태생적으로 불편해 하는 사람.
어느 날, 영혜가 불고깃감을 손질하다 손을 베여 작은 칼날 조각이 고기 사이에 씹히자, 다친 영혜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자신이 죽을 뻔 했다고 불같이 화를 낸다.
또한 영혜의 자해 이후, 정신 병동에 입원하여 지내는 동안, 기이한 행동으로 남들의 주목을 받는 그녀에게 먼저 다가가 보호해 주기는 커녕, 군중 사이에 섞여 영혜를 관찰만 하고 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책임의 관성으로 떠밀리듯 영혜의 앞으로 다가선 그가 처음으로 건낸 말은 괜찮은지를 물어 본 것이 아니라 지금 뭘하고 있느냐였다.
결국 남의 안위나 감정에 무신경하고 타인에 비정상으로 비춰질까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이다. 영혜의 입원이 장기화되자 이혼을 하겠다고 길길이 날뛴다. 동정심, 측은지심 등이 결여 돼 있으며,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식물이 되어버린 아이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가정이다. 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이자 모든 사랑의 출발점이다.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불행한 삶을 사는 어른이 된다. 영혜, 인혜 모두가 그랬다. 아버지의 비틀린 신념은 가정을 군대라고 오인한 것으로 부터 시작 되었다. 각 집단에서 요구받는 역할이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부하 벌주듯 체벌하며 키워온 사람. 의도 여부를 떠나 아버지는 모든 우울과 악의 출발점이 되었다. 자살을 하러갔다 되돌아 온 언니, 그리고 죽음을 향해 가는 동생. 외면하는 가족들. 그리고 멀어져 버린 남편들.
자매에게 남은 것은 서로 뿐이었다. 그 옛날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아홉살 난 영혜가 했던 말.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 191p
그 옛날부터 영혜에겐 우리, 즉 인혜 밖에 없었다. 결국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 탄 자매의 동상이몽. 인혜는 안도했고, 영혜는 생각이 많아 졌다.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돌아가고 싶은 집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차라리 어두운 산길이 나을 정도로 끔찍한 곳이었던 것이다. 어딜가나 볼 수 있는 나무처럼, 우리 주변에도 반드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 - 폭력과 우울, 그리고 욕망과 일탈.
그 모든 것이 이 책 한권에 모두 담겨 있다.
한강, 채식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