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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Aug 23. 2017

이방인, 알베르 카뮈

이방인과 일반인 사이, 차이점 부존.


 이방인은 누구인가


소설 이방인은 부조리의 대명사다. 부조리란 즉, 대다수가 옳다고 인정하는 틀 밖에 위치한 이방인을 가리킨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무미건조한 태도로 일관한다. 눈물을 흘리지도 않을 뿐더러, 어머니의 시신이 안치된 방에서 카페오레와 담배를 즐기기 까지 하는 것이다. 게다가 장례식 뒷 날, 여자를 만나고 희극 영화를 봤다는 사실은 재판장에서 공분을 사게 된다. 어머니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자유인으로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웠을 일들이 피고로서는 반인륜적 살인의 단초로 여겨지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방법은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 만큼 많다고 할 수 있다. 꼭 울고, 식음을 전폐하고, 즐겁지 않은 삶을 살아야만 제대로 된 애도일까?

뫼르소는 아랍인을 죽여서 체포되고 기소되었지만, 판사가 사형을 구형한 이유는, 뫼르소가 뻔한 인간이 아니어서다. 또한 증인들의 증언도 뫼르소의 살인이 아닌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인 그의 태도에 대해 진술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형을 선고받은 뫼르소는 자신의 방 쪽으로 다가오는 작은 발걸음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문에 귀를 대고 그들이 사형 집행 자들인지 아닌지를 살핀다. 발소리가 멀어지면 또 다시 24시간의 삶을 살게 된 것에 감사하기도 하지만, 대게는 우울하다. 누구나 태어나 죽으므로, 세상 사람 모두가 사형수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죄 판결이 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또한 감옥에서의 삶은 평소엔 모르고 있었던 것을 일 깨운다. 언젠가 어머니가 했던 발언들을 떠올려보며 이해하기도 하고,  어머니가 왜 인생의 막바지에서 로맨스를 통해 삶에의 의지를 불태웠는지도 알 것 같기도 하다.

왜 죽음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자유에의, 그리고 행복에의 열망이 타오르는 것 일까.


이방인, 현대인을 닮은


뫼르소는 현대인의 전형이다. 자신만의 방에 틀어박혀 감정적으로 무뎌지고, 자기 내면의 삶과 가치를 무엇보다 우선시 여기면서도, 타인과의 관계에 목말라하는 고독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
뫼르소도 어머니의 죽음에 울지는 않았지만,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삶을 통해 어머니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한다. 다만 감정을 딱히 정의할 수 없을 뿐이다.

이 같은 모습은 전통적 관계에서 탈피하여, SNS 등으로 활발히 타인과 교류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가족에 소홀했다고 그게 사형을 선고받을 만한 이유가 되는 것 일까? 비인간 적인 것이 아니라, 신인류적 문제인 것 이다. 변화된 상태를 기존의 잣대로 평가하면 탈이 날 수 밖에 없다.

살인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지만,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것은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끈질기게 레이몽을 미행하던 아랍인 무리들이 결국  레이몽에게 상해를 입혔고, 뫼르소에게도 단도를 꺼내들며 위협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들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 눈물도 흘리지 않고 건조한 태도로 일관했던 반인륜적(이라고 여겨지는) 행동에 의해 묵살되고 만다.
오히려 살인죄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전혀 상관없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결부시켜 사형을 구형한 판사가 부조리의 극치 아닌가?

무미건조한, 별다른 일을 기대할 수 없는 삶속에서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던 뫼르소에게 어머니는 부양해야 하나, 가난으로 인해 부양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고, 깊은 대화 한 번 나누어 보지 못한 타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살라마노 영감이 그토록 구박하던 개를 잃어버리고, 다시 돌아오길 바라며 눈물을 보일 때, '왜 인지' 모르지만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으로 보아 , 어머니의 부재에 뫼르소도 슬픔을 느끼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남들과 똑같은 것을 강요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다. 그렇다면, 어머니에 대한 존중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기력으로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판사가 말하는 인륜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는가? 가면이 아니라, 내면을 보아야 한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얼마든지 꾸밀 수 있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고뇌한다.


사형 구형에 대한 상고가 기각돼도 죽을 운명이고, 상고가 받아 들여져도 다른 사고나 노화로 어차피 인간은 모두 죽을 운명임을 생각하며, 어머니의 장례식 운구 행렬 때 '천천히 가면 일사병에 걸릴 수 있고, 빨리가면 탈수증으로 쓰러질 수도 있다'는 간호사의 말을 떠올린다.


그것은 곧 아랍인을 쏠 때 한 발을 쏘든, 뒤이어 네 발을 쏘든 살인을 한 것은 마찬가지이며, 한 발과 나머지 네 발 사이의 간극에서 어떤 이유를 찾으려 하는 것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하다는 나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어머니의 죽음에 무조건 적인 눈물을 강요하며 살인의 동기나 정황 증거를 무시하고 감정적으로 사형을 구형한 사회가 부조리 한가, 아니면 태양 때문에 다섯 발을 쏴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 뫼르소가 부조리 한가?

나와 같을 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곧 남과 다른 점은 묵살되어도 좋다는 무언의 동조나 마찬가지다. 우연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다 놓고, 전혀 예기치 못한 전개로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뫼르소 또한 일련의 우연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면서 우발적인 살인을 하게 된 것이며, 그것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한데 묶임으로써 어떠한 결과를 불러 일으킬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오류다. 이러한 부조리에 모두 침묵함으로써, 뫼르소는 인간의 심판에 무릎 꿇는다. 대다수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개인을 비정상의 범주로 몰아 넣는 것은 속박이고 굴레다.
폭력이고 부조리다.

이 사건을 인정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여읜 청년이 장례식에서의 그 무더위와 태양 빛에 강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고, 아랍인의 단도에 비춰진 태양이 일순간 그 트라우마를 자극하여, 정신적인 문제로 다섯 발을 쐈다고 판단했더라면? 단언컨대, 사형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보통사람이었다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을 지성과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을 권리가 한 사람의 피고인에게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 되었다. 별다른 기삿거리 없는 여름 날, 단지 대중들에게 가쉽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작정하고 판을 짠다면, 어머니가 아니라 키우던 개의 죽음에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사형을 때릴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마지막 메세지


독립된 객체는 그 유일한 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기성의 완력에 무너지고 만다. 다수의 정설만이 삶의 이치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입이 얼마나 편협하고 몰개성한지 자각하지 못하고 그 오만하고도 보편적인 정설에 대한 고발을, 권위에의 도전이라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 고로, 나 또한 유죄다. 특수성을 존중치 않는 보편의 편에 서지 않을 것이므로.

오늘 이 순간에도 수 많은 이방인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증오의 함성을 보내는 대신, 오히려 그들의 편에 서서 이방인이라는 이름표를 떼어 낼 것이다.
어차피 소수가 모이면 다수가 되는 법.


판은 언제나 뒤집힐 준비가 되어 있음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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