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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Sep 07. 2016

종의 기원, 정유정

악이란 스스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만들어 지는 것인가.

인간은 생존을 위해 선과 악이 공진화된 존재다. 처음부터 악인으로, 선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과정에서 어떤 쪽을 택해 진화하느냐에 따라서 개인의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다.


물론 본질의 차이는 있다. 어떤 사람은 별다른 선과 악의 선택 없이도 물흐르듯 평범한 삶을 살거나, 악을 포장해 선인의 흉내를 내며 살기도 한다. 문제는, 비둘기의 세상에서 매로 태어나 억압받고 통제 받는 학습의 삶을 사는 포식자의 경우다.


유진은 자신의 간질을 고치기 위해 지난 16년간 '리모트'를 복용한 줄로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달랐다. 자신의 본질을 억제하기 위해 약을 복용해 온 것이며, 때문에 투약을 중단 했을 때마다 피냄새가 진동하는 전조증상과 함께 피식자를 찾아 다니는 포식자로서의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유진은 똑똑한 선택을 해야 했다.


자수를 하느냐, 죽어 버리느냐, 혹은 죽여 버리느냐.


 그러나 마지막의 순간에도 생존을 위해 악을 선택함으로써, 더욱 공고히 악인으로 진화해 나간다. 총 4번의 살인 끝에 새우잡이 배를 타고 꼬박 1년을 떠돈 후, 마주한 삶은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준다. 마지막까지 자수하기를 권했던 해진은 졸지에 '거둬서는 안될 머리 검은 짐승', '군도 면도칼남'으로 전락해 있었고, 유진은 생사가 불분명한 H군이 돼 있었다. 꽤 그럴듯한 그림이다.


'악'은 호도 속에 더욱 대담해 지고, 또 다시 피비린내와 함께 유진의 곁으로 돌아 온다.

자명하다고 모두 사실은 아니다(311p). 악의 출발은 어디였을까.


유민을 낳고 3개월 만에 들어선, 자신의 경력 단절을 초래할 작은 생명을 죽여야 겠다고 결심 했을 때?

우산 위에 여자의 머리를 덜렁 꽂아 올린 그림을 보았을 때?

산 속에서 공포에 질린 토끼의 피 비린내를 뒤 쫓아 가는 아이의 쾌감이 어떤 것인지 알아 채지 못했을 때?

혹은 단편적 사실로 유진을 유민을 죽음으로 끌고 간 살인마로 단정지었을 때 인가.


선과 악은 만인에게 제공되는 선택지이며,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수 없이 많은 선택을 한다. 유진의 어머니가 매번 자문을 구했던 성모 마리아는 그녀가 죽임을 당해 버려졌던 옥상에 임하지 않았다. 유진이 죽인 피해자가 귓바퀴에 차고 있었던 피해자 어머니의 유품인 진주 귀걸이 또한 살해 당하는 것을 막아줄 부적이 되어주지 못했다. 결국 악인과 선인을 결정 짓는 것은 개인의, 즉 살인마의 의지였다. 더 끔찍한 사실은 살인은 피해자를 제압해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선택적 수단일 뿐, 그 속에 숨겨진 본질(악)은 '정상'이라는 가림막이 거두어 진 후 드러나도 늦지않는 최후의 비밀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정상과 비정상, 그 사이의 경계만 잘 지키면 자기 안의 악을 뒤집어 꺼내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 경계에는 충동이 있다. 그 충동을 다스리면, 적어도 남들 앞에서 철컹철컹 수갑차고 감옥으로 직행하는 치욕은 막을 수 있다.


유진은 조용하고 침착했다. 승패에 집착하긴 했지만, 기다릴 줄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오해로 섣불리 프레데터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고, 16년 간 자신을 조종하는 리모트(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약, Remote-control과 비슷한 발음으로 유진의 악을 통제하는 리모컨과 같은 역할을 한다.)라는 약을 복용함으로서 악에 대한 충동 뿐만 아니라 삶에의 욕구마저 짓눌려진 삶을 산다. 그리고 16년 간 억제와 통제 속에서 억압되어 살아온 청년은, 약 복용을 중단했을 때 어마어마한 흥분과 광기를 마주하게 된다. 두려움의 뒤를 쫓고 피에 욕정을 느끼며, 악인으로 진화해 간다.


그러나 시기 적절히 그 충동을 억제하고 현장을 피해 도망간 까닭에 유진의 악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한 번이라도 본 목격자들은 모두 죽어버렸기에 의심을 받을 이유도 사라져 버렸다.


잠깐, 선은 언제나 이겨야 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그렇게 학습되었을까. 왜 항상 악을 행하고자 하는 충동을 이겨내라고 교육 받았을까.


모두 악의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사회가 우리에게 리모트를 처방하고 성모 마리아 앞에서 기도를 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악이 이겼을 때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이며, 선이 이겼을 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일까.

확실히 악은 충동적이고 거칠며, 자비가 없을 뿐더러 지나치게 강하다. 악은 감정이 없으므로 사랑, 동정, 배려 등 결정적인 순간 발목을 잡는 구질한 양심 또한 없다. 악은 무소불위의 존재이다. 즉, 브레이크 없는 스포츠카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선은 선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패배자가 된다. 스스로 악으로 규정한 세부 항목들을 강박적으로 피하려 하고, 금단의 열매를 먹고자 하는 충동을 억제하고, 선과 악의 경계를 넘지 않으려 몸을 사린다. 무엇보다 악을 선도하려는 무쓸모한 소망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링 위에 두 선수가 있다. 한 쪽은 악. 다른 한 쪽은 선. 악은 눈 앞의 적에게 무차별적으로 난타를 퍼붓고, 선은 급소를 피해, 주심의 안전을 걱정하며, 관중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공격한 번 펼쳐 보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는 뚜렷한 패배에도 자신은 선을 지켰다며 뿌듯해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기지 않았다. 악을 이기려면 적어도 대등한 힘을 길러야 하는데, 승패와는 상관없이 양심이니 도덕이니 선이니 하며 착하게 살아온 것에 대해 자기 위안을 하며, 맞서 싸워볼 생각 조차 않는다. 바로 그것이 피식자와 포식자간의 간극이다. 조금 더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 겉 보기에는 아름다운 그것이 본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지도 모르는 채, 착한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다행인 것은 세상에는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조금 더 많다는 것, 서로에게 무해하려고 노력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조금 얻어 터지더라도 용서하고 넘어가는 사람의 숫자가 아주 조금 더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을 택했다는 이유로 조금은 먼 길을 돌아서 갈 지라도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머릿 속 어딘가에 악을 키우고 살더라도 '리모트'를 처방받아 그 충동을 조련하며 정상인의 범주안에 한 발을 걸치고 살아가는 것이다.


조금은 무기력해 보일 지라도, 적어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바로 유진이 리모트를 복용할 때의, 악의 충동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가 바로 선이다. 약을 끊었을 때,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에서 광기어린 눈을 꿈벅이는, 타인의 두려움을 재미삼아 사냥을 즐기는 모습은 단연 악.


딱히 선이 좋은 것이고 악이 나쁜 것이라고 규정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때로는 악이 필요할 때가 있고, 선이 필요할 때도 있으며, 사람은 선인이나 악인이 아니라 그 두가지의 것이 공진화한 생존자라는 것,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과 악을 적당히 조절하며 살아간다는 사실만을 희미하게나마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 선과 악 사이를 줄타기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악을 이기려거든 다른 악이 필요하고 선에 감사하려면 다른 선이 필요하다. 다만 선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악은 어떤 식으로든 남을 상하게 하므로 악을 행하고자 하는 충동을 눌러줄 '리모트'가 필요하다는 작은 차이점이 있을 뿐, 그 둘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본성인 것이다.


자수를 하느냐, 죽어 버리느냐, 혹은 죽여 버리느냐.


<종의 기원>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있는 악과 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악인은 악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에 따라 굳어진 것일 뿐, 악인이라고 선한 행동을 아예 안하고 살지는 않으며 선인이라고 해서 악한 행동을 절대로 안하는 것은 아니다. 운명은 우리에게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며, 빨리 하나를 고르라고 재촉한다. 그리고 우리가 고른 답안에 따라, 우리는 선인이되고 악인이 된다.


마지막, 그 짠바람과 함께 또 다시 피 비린내가 유진의 코 앞으로 불어 닥쳤을 때. 과연 유진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선택지는 아직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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