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요 May 29. 2021

애도는 항상 처절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남겨진 사람들의 감정에 대하여



어제 유튜브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은 영상 하나를 아주 우연한 기회로 시청하게 되었다. 한눈에 봐도 앳된 아내가 대장암으로 임종을 앞둔 남편의 모습을 손수 찍어 20여분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안에 꼭꼭 눌러 담은 영상이었다. 투병을 하다가 호스피스로 옮긴 지 하루 만에 마지막 숨을 내뱉은 남편의 이름을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불러주며 ‘사랑한다, 잊지 않겠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거는 주문처럼 되뇌던 어린 신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여개의 댓글은 대부분 고인의 명복을 비는 내용이었는데, 가끔가다 눈살 찌푸려지는 악플들이 눈에 띄었다. 단지 자신들이 생각하는 애도의 방식과 조금 다르다고 해서 마치 자연히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인양 훈계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오판하고 속단하여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인의 명복을 빌거나, 남겨진 아내에게 힘내라는 응원 한마디 없이 무조건 화부터 내고 있더라.


타인에게는 혹독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자신들은 인간이라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그저 혼내고 타박하는 권위자 포지션에만 심취한 한심한 종자들 때문에 그 어떤 가치로도 환산할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영상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애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애도라 하면, 보통은 울고 슬퍼하며, 곡기를 끊고 일상생활이 불가할 정도의 우울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함께 많은 시간을 같이 하면서 오랜 추억을 공유한 누군가의 부재는 어떻게든 상처로 남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우울이 신체화되어 물리적인 고통으로 치환되는 경우도 있다. 죽음이란 것은 슬픈 게 맞다.


그러나 그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영화로, 노래로 달랠 것이며, 고립되어 오롯이 홀로 모든 감정을 떠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에 둘러싸여 떠들썩한 가운데 안정감을 느끼며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울함을 달래려 폭식하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예 아무것도 먹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에게 처벌을 내려, 남겨졌다는 죄책감을 떨치려 할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믿음이 강한 사람은 현생에서 겪었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절대자가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로 불려 가 영원한 안식을 찾을 것이라며 오히려 투병할 때보다 마음이 가볍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개인의 수만큼이나 많을 애도의 방식들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나누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접근이다. 단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죽음을 놓고 명복을 빌기 이전에 잘잘못부터 따지려 드는 편협한 태도뿐이다.


감정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시청한 그 영상은 단지 조회수나 구독자를 노리는 흥미 본위의 쓰레기가 아니라, 생명의 유한함을 뛰어넘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귀중한 보물이었다. 간성혼수로 인한 섬망 증세로 알 수 없는 소리를 반복하는 낯선 남편의 모습이 두렵고 무서우면서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한 껏 묻어나는 떨리는 목소리에서 악플러들은 도대체 무엇을 들은 것일까.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남편을 병간호하려고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도서관에서 사회복지관에서 단기 알바를 전전하며 매 순간 씩씩하고 밝게 고난을 이겨나가던 어린 신부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을 앞에 두고, 혼내고 꾸짖고 욕을 할 수 있는가. 전부를 잃은 사람 앞에서 도덕적 우월감을 지녀본들 현실에서도 없는 권위와 자격이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을 터. 자신의 본명이 아니라 허상의 닉네임 뒤에 숨어서 가르치려 들지 마라. 선생이란 자격은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타인의 죽음 앞에 절망하고 좌절하라고 강요하는 것이야 말로 누구의 공감도 살 수 없는 괴이한 폭력이다. 4년을 함께한 부부의 삶을 20분 길이의 영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유튜브 화면 밖의 삶에서 남편 잃은 아내가 얼마나 울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슬퍼할지 어느 누가 안다고.


자연히 발생하는 감정을 자기만 경험해본 양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슬픈 것은 슬픈 게 맞다. 그러나 슬픔을 강요하는 것은 틀리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랑은 곧 결핍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