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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Mar 16. 2017

심리학으로 읽는 영화 이야기 #15 로렌스 애니웨이

값싼 동조 심리, 자기 생각없는 사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프레드라는 약혼녀를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 로렌스. 그러나 그가 남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성별인 '남자'가 아니라 '여자'로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중을 세상에 드러내 보인 순간 사회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다. 여자의 화려한 네일아트를 대신해 줄 클립을 손가락에 끼우고 치렁한 가발을 쓰거나 치마를 입어 보아도, 남들의 눈에는 단지 '남자'로 보여지는 현실이 너무나 힘든 그다.

로렌스가 여장을 한 모습을 보고 수근거리는 사람들에 맞서 대신 화를 내주며 끝까지 그를 응원해 주었던 약혼녀 프레드 또한, 사회적 통념과 다수의 편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정상적'인 삶을 택하고 만다. 그러나 어느날 평범한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가던 프레드에게 갑자기 책 한 권이 배달된다.

계절이 나무에 떨어지고
그녀는 등을 기대고
희망이 없는 집 앞엔
우리의 과거가 있네
하얀 벽돌집을
덮을 수가 없네
활짝 핀 장미로도.

책에 쓰여진 시 구절을 읽고는 곧바로 작가가 로렌스라는 것을 직감한 프레드는 그 순간만은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 아이도, 남편도 잊어 버리고, 설원 속 로렌스네 집으로 찾아간다.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그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들에게는 현실이란 벽이 생겼다. 남편 전화 한 통에 바로 현실을 자각하게 된 프레드를 보는 로렌스의 마음이 씁쓸해 진다.

그 후로도 둘은 다시 만난다. 그리고 예전에 미처 다 하지 못한 사랑의 판타지를 실현 시키며 행복을 만끽한다. 또한 여느 연인들 처럼 사랑과 이별을 반복한다.


과연 프레드와 로렌스가 선택한 결말은 어떤 것일까.

 사회적 통념에 부딪치는 인간의 본질, 그리고 깨어지는 사랑.

독특한 색감, 잘 배열된 미장센, 세련된 음악, 그리고 감정과잉, 과다한 자기애 등으로 대변되는 높은 에고를 지닌 천재 감독. 바로 자비에 돌란의 영화에 따라 붙는 수식어다.


그리고 <로렌스 애니웨이>에서도 마치 그 수식어구들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겠다는 듯이 168분의 러닝타임 동안 이미지와 메타포의 나열, 변화 무쌍한 감정, 그리고 완벽한 미장센의 향연으로 지루할 틈이 없는 영상미와 더불어 귀가 즐거워 지는 세련된 배경 음악들이 쉼 없이 이어진다.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나는 그 사람을 왜 좋아하게 되었는가, 왜 사랑했는가, 왜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영화에서 로렌스는 여자가 되고 싶다고 했지 남자를 사랑하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이것은 편견이다. 서로 반대되는 성별간의 결합만을 정상적인 사랑이라고 학습시킨 사회 탓에, 성 소수자들은 언제나 사랑의 범주에서 배제되어 왔다.


사랑을 할 때 성별이라는 것은 외모나 직업, 재산, 공감대 등과 같이, 기호나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한 개인의 일부분만을 보고 그 사람의 전부를 판단해 버리는 우를 범한다. 자신이 본 그 사람의 단편이 마치 그 사람이 여러해 동안 다져온 본질인 것 처럼 믿어 버리는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이 반한 그 사람의 특정 조건만을 보려고 하지, 새로운 모습이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보면 받아 들이지 못해 싸우고 미워하게 된다.


그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은 어떤 개인의 기호나 선호에 따라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본질을 침해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생각대로 조종하려고 해선 안된다. 서로의 본질을 존중하며 간격을 좁혀 나가야 한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프레드는 로렌스의 본질을 이해하고 보듬어 주려고 했다. 남편이 될 사람을 위해 여자용 가발을 사야만 하는 여자의 기분이 마냥 좋기만 했겠는가. 그러나 결국 사회의 벽을 넘어설 수는 없었던 프레드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과의 관계를 접고, 너무나도 '정상적'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모든 편견을 넘어 선 사랑. 우리 사회에서 그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녀의 선택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든 죄 없는 자만이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 종교나 인종, 각종 기호와 선호에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곳곳에서 벌어지는 테러와 증오. 그 한 가운데에 선 우리 모두는 편견과 차이(Difference)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값싼 동조심리,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들

자주적이고 개성넘치는 프레드 또한 굴복하게 만든 그것, 다수가 쌓아 올린 사회적 편견이라는 벽은 도대체 누가, 어떠한 목적으로 세운 것일까.


바로 다수라는 타이틀 뒤에 숨어 불안한 자기(Self)를 숨기고 있는 나약한 자들의 작품이다. 이들은 자기의 생각이나 의견, 또는 주장이랄게 없이 남들의 말에 동조만 한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혹시나 자신이 '틀린' 생각을 하고 있을까봐 남들과 '다른' 생각을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이들을 일컫는 심리학적 용어도 있다. 바로 동조심리라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 없이 다수의 의견이나, 이미 굳어진 사회의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일컬어 동조심리라고 하는데, 이들은 생각이 편협한데다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므로 자기의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하거나 밀어붙이는 대신, 남의 주장에 자기를 일치시켜 안정과 질서를 찾으려 한다.


비록 말 할 용기가 없어 침묵하는 자들이지만 눈초리 만은 무섭다. 자신의 생각과 개성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매일마다 침묵의 벽에 몸을 내던져야 한다. 다수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닌데, 매번 생각있는 사람들이 생각없는 동조자들에게 상처를 받아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동조자들 때문에, 정말 자기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포기하게 되는 사람도 많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규범이나 윤리 역시 다수가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 정해 놓은 약속일 뿐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나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수, 기득권, 정상적 범주안에 들기위해 급급하다.


값싼 동조심리 때문에 사회는 더욱 획일적으로 변해간다. 한 쪽에서는 다양성을 인정하자고 아우성이고, 다른 한 쪽은 기존의 틀을 수호하자며 아우성이다. 그리고 두 무리 중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든 '소수'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든 로렌스는 로렌스다.

프레드에게 배달된 한 권의 시집은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회에 통용되는 기준에 맞추어 변해버린 자신을 과연 자신이라 말할 수 있는가?
프레드는 답이라도 하듯 로렌스를 찾아 떠난다.

<로렌스 애니웨이>는 사랑이란 옷을 입고 있는 것일 뿐 인간의 본질에 대한 영화다.

본질[本質]: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실존(實存)에 상대되는 말로, 어떤 존재에 관해 ‘그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성질.


나를 구성하는 본질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떠한 이유로든 그것을 바꾸어야한다면, 나는 이전의 나와 같은 사람인 것일까? 아니다.

로렌스 역시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평범한 삶을 버리고 자신의 본질을 세상에 드러냈다. 너무도 자신 다운 것이라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것, 그리고 숨기고 싶지 않은 것. 그러나 그것이 사회적 기준에 맞지 않는 경우, 반대 여론의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나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다수의 공통된 특성과 다르다고 해서 무시당할 이유는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용기가, 누군가에겐 누군가를 공격할 빌미가 된다.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특별한 것은 이상한 것이 돼 버린다.

따라서 로렌스의 용기와, 그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던 프레드의 관용은 세상의 오지랖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그럼에도 로렌스는 로렌스다. 성공한 여류(?)작가로 유명해지고 어떠한 편견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든 로렌스는 로렌스인 것이다.

자비에 돌란은 특유의 감성으로 세상의 편견에 맞선다. 스스로 커밍아웃을 한 이 젊은 감독은 누구보다 차별이나 편견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 영화는 곧 직업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더라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당찬 메세지 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의 포부를 밝힘으로서 음지의 모든 소수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준다. 자신을 비롯한 모든 소수자들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든,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든 바로 그 자신임을 세상에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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