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연말을 케빈과 함께 보내는 이유
분주한 집안.
사촌과 친척들로 북적이는 집안은 여행준비로 한창이다.
말썽쟁이 케빈은 어느 무리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결국은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엄마에게 혼나 풀이 죽고 만다.
바쁜 와중에 경찰관이 집에 들러 연휴 중 좀도둑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한다. 경찰관의 정체는 곧 케빈과 전투를 벌일 도둑 1.
그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연휴 때 비는 집을 조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행 당일 비행기 시간 45분 전 공항으로 출발하는 맥컬리스터 가족.
겨우 시간을 맞춘 가족을 실은 비행기는 이륙하고 집에는 케빈 혼자 남아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없는 엄마.
케빈은 차고로 가 차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공항엔 가지 않았다고 철썩같이 믿으며 자신이 가족들을 사라지게 했다고 생각하여 혼자 있는 시간을 만끽하려 한다.
케빈은 엄마나 형이 못하게 했던 행동들을 연이어 해보며 가족의 부재를 재확인 한다 - 은근히 가족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는 듯 하다.
계단에서 썰매타기, 플라스틱인형에 비비탄 쏘기, 형 방 뒤지기, 아이스크림 먹으며 영화보기...
이 꼬마 악동의 귀여운 악행들은 우리도 한때나마 꿈꿔봤던 혹은 실행에 옮겼던 것 들이 아닌가?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도둑들은 사전조사에 입각하여 체계적으로 혹은 허술하게 빈집털이를 시작한다.
그러나 파리로 떠났어야 할 맥컬리스터의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한 도둑들은 다급히 도망가고, 케빈은 그들 때문에 무서워 침대 밑으로 숨었다가 이내 겁쟁이나 숨는거라고 현관 밖으로 나가 하나도 안무섭지롱~을 시전.
그러다가 언젠가 형이 살인자라 말한 적 있는 동네 노인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집으로 들어온다.
이 시각 케빈의 부재를 알아 챈 가족들은 당황하고 경찰서에 전화하여 케빈이 무사한지 알아보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이미 도둑들과 노인때문에 무서워진 케빈은 경찰관의 노크소리에 더욱 움츠러 들 뿐이다.
다음날 가게에서 칫솔협회가 승인한 칫솔을 사러간 케빈은 동네노인을 마주치곤 계산도 안하고 달아나다 경찰관에 쫓기게 된다.
숨가쁜 하루를 보낸 케빈은 혼자있는 것을 숨기려고 마네킹을 조종하며 사람들이 집에 있는 것처럼 꾸민다.
도둑들도 집을 털러왔다가 또다시 철수하고, 여기서 케빈은 또 유명한 '영화로 피자배달부 놀리기' 를 시전한다.
이 때 엄마는 겨우 미국으로 들어오고 시카고로 돌아가야 하는데 항공 편이 없어 곤혹스럽다. 다행히도 착한 사마리아인, 아니 철지난 락밴드 아저씨의 도움으로 시카고로 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케빈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 선다.
그러나 행운은 언제나 불운을 동반하는 것.
도둑들은 케빈이 혼자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집을 털기로 한다.
케빈은 길거리에서 만난 산타할아버지에게 가족들을 돌려달라고 소원을 빈다. 아! 시간이 남으면 큰아빠도 돌려주라고.
집으로 오는 길, 마네킹이 아닌 진짜 사람들로 북적이는 다른 집들을 보며 괜히 울적해진 케빈은 성가가 울려퍼지는 교회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동네 노인과 조우한다. 처음엔 경계심을 품고 있었던 케빈도 먼저 다가온 노인에게 마음을 열고 혼자인 사람끼리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랜다.
몇년전 아들과 싸워 다시는 보지 않기로 한 후 교회 성가대로 있는 손녀딸을 몰래 보러왔다는 말을 듣고 케빈은 나름의 조언을 해 준다.
한 번 그냥 말을 걸어보고, 아들이 말을 받아주면 그걸로 화해가 되는 것이고 안받아주면 아직 덜풀렸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 노력을 해 볼 수 있으니 좋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도 아무리 싸워도 아빠랑 말은 하고 지낸다고 덧붙인다. 특히 크리스마스에는.
집으로 들어와 전투계획을 세우고 도둑들에 맞설 준비를 하는 케빈. 나름대로 체계적이고 치명적인 장치들을 설치하고 도둑들을 기다린다.
식전 기도를 올리고 늦은 저녁을 먹으려는 찰나, 아홉시 정각을 알리는 괘종시계의 종소리를 들으며 도둑이 목전에 왔음을 직감한다.
D-time.
그리고 처음부터 된통 당하는 도둑들.
비비탄에 맞고 기름칠한 계단을 나뒹굴며 제대로 집들이 시작.
다시 뒷문으로 잠입을 시작하는 키큰 놈은 다리미와의 화끈한 키스와 더불어 끈끈이가 들러붙은 계단에 신발이고 양말이고 다 벗겨져 맨발에 못박혀 쓰러지고, 앞문으로 들어가려던 뚱뚱한 놈은 벌겋게 달아오른 현관문에 손을 데이고 나서 다시 심기일전하여 집안으로 들어가려다 머리까지 홀랑 다 태우고 만다.
겨우 집안으로 들어갔으나 베개 속 거위털을 뒤집어 쓰고 마는데 이때, 도둑들은 본인들의 '새'된 운명을 받아들이고 공손히 집밖으로 나갔어야 했다.
케빈이 911에 신고하는동안 두 도둑은 계단을 올라가다 위에서 떨어진 페인트통에 맞고 쓰러진다. 이 때 도둑 1의 금이빨도 빠지고 만다.
이 틈을 타 케빈은 길게 늘어진 밧줄 위로 옷걸이를 타고 집밖의 오두막으로 탈출.
그를 뒤따르던 뚱뚱이와 홀쭉이는 케빈이 밧줄을 잘라버림으로써 지상낙하.
그러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했던가.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간 케빈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온 도둑들에게 잡히고, 그들은 케빈을 낚아채 매달아 놓고는 온갖 복수를 다 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하지만 두 도둑의 말로는 동네 노인의 제설용 삽에 머리를 얻어 맞고 쓰러지는 것일 뿐이었다. 노인이 도둑들을 제압한 사이 경찰이 와 사건은 일단락 된다.
케빈은 쓸쓸히 트리 앞에 선물을 놓고 자신의 양말을 한 번 만져본다 마치 길거리 산타에게 빌었던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 졌는지 확인해보려는 것 처럼.
이때 엄마를 태운 트럭안에서 락밴드 아저씨는 여행날 아들을 빼먹는 엄마가 어딨느냐며 스스로 자책하는 엄마에게 자신도 길거리 음악하느라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아내의 장례식에 애를 두고온 적도 있다고 시간이 지나면 모두 괜찮아진다고 말해준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애들은 금방 잊는다고 엄마를 위로하는 사이 트럭은 시카고에 도착하고, 낡이 밝아 온다.
아침에 일어나 엄마를 부르는 케빈. 그러나 아직도 혼자다. 텅빈 거실을 보며 실망해 다시 침실로 올라가는 케빈. 이때 엄마가 집으로 돌아와 벽난로 위 양말을 둘러보고, 인기척에 다시 계단을 내려온 케빈에게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낸다.
열번을 봐도 열번 다 눈물이 터지는 이 장면.
엄마는 케빈이 무사함에 감사하고, 애를 놓고 가버린 게 미안하고, 혼자 얼마나 무서웠을지 가여워 하며 케빈을 꼭 안아준다. 케빈도 섭섭함과 두려움은 저 멀리 날려버리고 눈 앞에 있는 엄마를 꼭 끌어 안는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케빈이 불쌍해서 울었는데, 요새는 엄마의 심정을 생각하면 얼마나 애간장이 탔을까 싶어 눈물이 난다.
이렇게 감동적인 모자 상봉의 순간은 뒤이어 뛰쳐들어온 다른 가족들에 의해 깨져버린다. 아니 오히려 재미로 전환 국면을 맞이하는 영화의 끝자락.
가족들이 없어진 사이 뭘했냐는 질문을 받은 케빈은 그냥 신나게 놀았다고 답한다. 바닥에서 금이빨을 주워든 아빠는 괜히 자기 이가 시린 느낌.
그리고 창밖으로 소원해졌었던 아들 내외와 화해하는 동네 노인의 모습이 이어지고 곧이어 내방에서 도대체 뭘했냐는 형의 외침으로 이 영화는 끝난다.
우리가 연말에 '나홀로 집에'를 보는 이유
Home Alone. 이 영화는 응당 있어야 할 것의 부재를 말하고 있다.
크리스마스라는 연휴와 맞물려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항상 부대끼고 투닥 거리던 가족들의 부재로 어딘가 외롭다. 인간은 원래 고독하기에 혼자 있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지만, 명절이나 연휴 때 혼자있다는 이유로 범죄의 표적이 되는 현실이 참 아프다.
각설하고. 내용면에서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가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이렇게 사랑을 받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우리가 집단 최면에라도 걸려 있는 것일까.
일단 '나홀로 집에'는 이러나 저러나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케빈과 함께 한 크리스마스가 인생 최고의 파라다이스였음을 깨닫게 된 '어른이'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물론 영화가 주는 재미 그 자체도 크지만, 그 시절의 '나'가 그리운 모든이들에게 이 영화는 유년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추억의 앨범같은 존재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나'는 씁쓸한 차에 푹 찍어 먹는 그 통통하고 관능적인 '마들렌'을 통해 유년의 추억을 회상하게 된다. 나에게 있어 이 영화는 마들렌 처럼 내 옛날의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만드는 매개체이다. 그래서 여러번 봐도 질리지 않고, 어린 '나'의 기분을 되살리기 위해 일부러라도 찾아보는 인생 영화가 되었다.
모두가 떠나고 텅 빈 집 안에서, 케빈은 그 동안 통제되고 금기시 되었던 온갖 악행(이라고 해 봤자 어린 애 장난 수준)을 저지르며, 잠시나마 해방감을 누린다. 하지만 이내 그런 행동들이 행복이나 만족감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말라는 행동도, 못하게 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누구의 통제도 없는 공간에서는 행동 그 자체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어져 버린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혼자 살 때의 자유를 반납하는 대신 그들의 체온과 웃음과 격려, 그리고 안정감을 얻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특히나 아직 자아가 굳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배우고, 맨날 치고 박고 싸우는 형일 지라도 세상에는 마냥 사이가 좋을 수만은 없는 그런 부류의 사람도 있다는 교훈을 주는 대상이 된다.
이 영화에서 가족이 모두 어울리는 장면은 단지 초반 몇분과 후반의 몇분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가족영화로 불리게 된 이유는, 그들의 부재에서 오는 허전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가족이 없는 연휴, 케빈은 혼자 장을 보고 빨래도 하고, 도둑의 습격에 대비해 전투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혼자로서의 불완전함을 숨기려 마네킹과 판넬을 동원하는 장면은 본래의 의도와는 이질적으로 흥이 나는 음악과 케빈의 춤사위로 인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도둑들을 따돌리려는 어린 아이의 다급함이 느껴져 어딘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가족과 함께라면 불필요했을 행동들이 혼자이기 때문에 꼭 해야만 하는 생존의 수단이 된 것.
우리는 성인이 되고나서 이 '혼자이기 때문에 꼭 해야만 하는 생존의 수단'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하여 내삶도 네 삶도 없이 살고 있다. 오죽하면 지난 대선 모 후보의 '저녁이 있는 삶'이란 캐치 프레이즈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왔을까.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해보고 싶은 것은 다 해보고 하기 싫은 것은 안하고, 입안의 혀 같은 삶을 편히도 즐겨 왔다. 가족으로 부터 독립한 지금, 상사의 잔소리, 성에 차지 않는 월급, 진급에의 부담감, 결혼의 압박 등 외부 요인에 의해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냥 저냥 학교 다니면서 공부보다는 수다에 매진하고, 방학되면 적당히 탐구생활이나 끄적이며 신선 놀음 했던 초딩의 삶과는 너무나도, 극명히 대조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영화에 이유없이 끌리는 게 아닐까?
어린아이였을때는, 세상이, 그리고 사회가 어떤 곳임을 몰랐기에 누구나 장래희망으로 대통령이니 의사니, 변호사니 하는 기득권의 삶을 꿈꿔 왔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여 회사원이나 되자 하고 너도 나도 취준생활에 골몰한 사이, 케빈은 순수하게도 어른을 상대로(그것도 극악무도한 절도범들을 상대로) 이겨보겠다고 전투계획도 세우고 누구한테도 배운 적 없는, 단순히 자신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기발한 장치들을 설치하여 실전에 써먹기도 한다. 게다가 진짜로 이겼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그다지 느껴보지 못했던 성취감이라는 것이 마음속에 패배주의 의식으로 낮게 깔려 있다가 케빈이 도둑들을 소탕할 때의 카타르시스로 상쇄되는 것이다.
이처럼 맹랑하면서도 순진무구한 케빈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엄마가 외갓집으로 놀러가는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다 몇시간 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동네 떠나가라 울었던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의 부재. 그것은 가족의 부재가 아닌가 싶다. 옆에 있을 때는 모르지만 떨어져 보면 그 빈자리가 너무도 큰 가족의 존재. 맨날 싸우고 부대끼면서 남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다가도 언제나 내 온전한 편이 되어 주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
이러한 울타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어른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어디서 난 생채기인지도 모를 것들을 마음에 한가득 달고 내 어린 순수의 대변인인 케빈을 만날 날만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즉 혼자가 된 어른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으로부터 잠시나마 도피 하기 위하여 이 영화를 보고, 세상 무서운 줄 몰랐던 엄마 치맛폭 속 '나'의 어린시절을 추억하기 위해 이 영화를 보는 것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고단해진 성인의 마음을 달래줄 영화 한 편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 이것이 방송국에서 '나홀로 집에'를 주구장창 틀어 주는 이유임과 동시에 우리가 주구장창 이것을 보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