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영화 2

20250709

by 고요

영화보다 영화로운 삶


영화롭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영화롭다'는 말은 '몸이 귀하게 되어 이름이 세상에 빛날 만하다.'라는 뜻이다. 나는 국어사전에서 권장하는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영화롭다라는 말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이는 예상하셨다시피 영화 같은 상황이나 영화에 나올 법한 일들을 두고 하는 말로, 몸이 귀하든 귀하지 않든 모든 존재에게서 특별히 기억할만한 사건이 세상에 나와 빛날 만하다는 의미이며, 비슷한 예로 소서롭다(소설 같다. 이 역시 내가 만든 말이다.)가 있다.


내 삶은 늘 평범했다. 보잘것없다고 하기엔 가끔 빛났고, 초라하다고 하기엔 부족함 없이 늘 풍족했었다. 사람 때문에 죽도록 아팠던 적들이 많지만 사람 덕분에 웃기고 행복했던 일들도 넘쳐났으며, 인생의 반은 고요하게 나머지 반은 귀청이 떨어져 나갈 만큼 시끄럽게 보냈다.


이렇게 평범한 내가 역시나 별다를 것 없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과 '내 인생의 영화 같은 순간'을 주제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다. 다들 금방 그 순간을 기억해내지 못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대도 영화 같은 순간이란 말은 입 속에서만 맴돌고 나에게 그런 시간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뿐이었다.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게 정적이 흐르자 그럼 '내 인생에서 가장 쪽팔렸던 순간'을 이야기해보기로 했고, 쪽팔렸던 순간은 다들 스스럼없이 기억해 내는 듯했다. 나 역시 매번 복기하고 후회했던 순간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또다시 정적이 흘렀지만 전의 정적과는 달랐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나만 알고 싶은 쪽팔렸던 이야기를 과연 이 사람들에게 해도 괜찮을 것인가. 이 사건을 두고, 두고두고 놀림을 받는 건 아닐지 고민하는 시간의 침묵이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대략 2년에 한 번씩 정도 쪽팔리는 경험을 하는데, 언제 걸 들을래? 가장 최근의 일이 그나마 덜 쪽팔리니까 그걸로 할까 봐. 최근에 이케아에 다녀왔는데 식당에서 밥을 시키고 들고 돌아오는 길에 더러운 테이블을 닦으려고 휴지를 찾던 참이었어. 다른 사람들도 다 열심히 테이블을 닦더라고. 근데 마침 눈앞에 물티슈가 보이는 거야. 그래서 난 당연히 식당에 있는 물티슈인 줄 알고 자연스럽게 두 장이나 빼 왔는데, 그게 알고 보니 어느 테이블의 개인 용품이었던 거야.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밥을 먹고 있다가 별안간 어떤 물티슈에 굶주린 어떤 여자가 자신의 테이블에서 물티슈를 무려 두 장이나 빼가는 장면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거지. 내가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너무너무 충격에 빠져 밥도 못 먹고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으니까 아빠가 대신 그 테이블에 사과드리고 왔어. 그때 진짜 얼마나 쪽팔렸던지 난 사과할 생각도 못하고 혼자 머리를 쥐어뜯고만 있었다니까." 그게 뭐가 쪽팔리냐고, 그런 건 살면서 흔하게 있는 일이라고 질타와 비웃음을 받은 나는 크게 쪽팔릴 일이 별로 없는 내 삶에 감사하며 겸허히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나를 믿고 기꺼이 자신의 쪽팔림을 얘기해 준 친구를 배신하고 이곳에 쓰고 싶을 만큼 그들은 처참하게 망가지고 웃겼으며, 괜히 나까지 어딘가에 숨고 싶어졌다. 그 경험들에 자극받아 우리는 배틀처럼 누가 누가 더 쪽팔린 경험을 했나 경쟁하기 시작했고, 상대적으로 빈약한 쪽팔림 경험 보유에 조급해진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교회장 선거에 호기롭게 나갔다가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조차 뽑아주지 않아 꼴등을 한 이야기, 중학생 때 빙판이 된 내리막길을 조심조심 내려가다 삐끗해 울면서 한참을 미끄러져 내려간 일,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놀러 나가자마자 마침 아르바이트하던 가게 앞에서 철퍼덕하고 넘어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던 일(가게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절뚝거리며 놀러 나갔다), 과제 발표하다 교수님께 지루하니 그만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일 등을 마구 얘기했다. 그 순간엔 더 많이 쪽팔릴수록 승자였기에 각자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으나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 우리는 모두 허탈한 패배자였다.


쪽팔림을 공유한 우리는 서로의 원치 않는 기억을 쥐고 있었기에, 전보다 더 끈끈하고 애틋함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만남에서도 종종 '내 인생의 ~~'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는 엄청 건전하고 단조로워 보일 수도 있지만 생각 이상으로 재밌었다. 내가 아는 사람의 환희와 절망을 꼼꼼히 알게 되는 일은 나에게서 너에게로 세계가 확장되는 숭고한 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허락을 맡고 한 가지 에피소드만 더 적어보겠다. 그날은 비가 매섭게 내리는 날이었다. 날씨에 선뜻 마음을 뺏기지 않는 우리는 젖은 머리와 신발에도 아랑곳 않고 오늘의 주제를 선정하기 시작했다. 토론 끝에 '내 인생에서 제일 좋아했던 것'이 선정되었고 디테일을 추가하기 위해 앞사람이 말한 카테고리는 제외하고 이야기하기로 세부 규칙을 추가했다.

B의 카테고리는 '동성'이었다. B는 어쩌다 우연히 그 사람을 알게 되었고, 처음 본 순간부터 이 사람과 당장 친해지고 싶어서 홀로 온갖 작전을 다 펼쳤다고 한다. 전시는 다리 아프고 어렵다고 싫어했으면서 그가 전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괜히 관심 있는 척 몇 번 다녀도 보고,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면서 그가 있는 회식장소는 꼭 참석했더랬다. 담배 냄새를 혐오하지만 그가 피우는 담배는 또 왜 그렇게 멋있어 보이던지, 그가 자리를 비우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을 때 B도 편의점에 뭐 사러 가는 척을 하며 같이 자리를 비워 덕분에 쌓인 숙취해소제만 수두룩했다. 하지만 노력과 달리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던 B는 결국 그와 친해지는 데에 실패하게 되고, 그저 SNS에서만 훔쳐보는 정도가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SNS 비공개 계정으로 좋아하는 몇 연예인과 그의 일상을 훔쳐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상대방이 자꾸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스토리를 보는 것이 께름칙해 비공개 계정으로 돌려버려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B는 그를 친구라고 부르기엔 너무 애틋했고, 그렇다고 사랑이라고 하기엔 아무것도 몰라서 그냥 '제일 좋아했던 것'으로 남겨두기로 했다고 얘기했다. 왜 그렇게 B를 좋아했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너무 나 같아서.'라고 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눈썹이 꿈틀대며 폭 페이는 미간 주름도 너무 나 같고, 끊임없이 버림받고 내팽게쳐져도 결국엔 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너무도 나 같아서. 나는 B가 어떤 마음으로 상대방을 좋아했는지 너무 알겠어서, 그리고 여전히 제일 좋아하는 카테고리 맨 위에 걸려있을 정도로 얼마나 애틋한지 너무 알겠어서 그날 저녁을 샀다. 어떤 이야기는 따뜻한 밥 한 끼를 사주고 싶어진다. 또 어떤 이야기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상대방을 넉넉히 품어주고 싶게 한다.


사실 이런 게 영화가 아님 무언가. 모두의 인생은 큰 화면으로 박제되어 몇 번이고 상영되어도 좋을 만큼 아름답고, 또 영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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