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7
얘들이 작정을 했나.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면서 돌아가면서 나를 유쾌하지 않게 만들고 있다.
몇 가지가 있지만 당장 오늘 일어난 불유쾌 사건이 제일 생생하기에 적어보도록 하겠다.
호수와는 안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이십 대 중반에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만나서 내 친구 중 가장 알고 지낸 햇수가 적다. 일할 때는 친한 건 아니었고 퇴사하고 나서 더 친해졌다는 게 아무래도 친구가 될 운명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바로 인하면 호수는 잔잔하지만 요동치는 사람이다. 어쩔 땐 수면이 너무 맑아서 속까지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데, 또 어쩔 때는 그 심연에 뭐가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누가 아주 작은 자갈이라도 던지면 물수제비를 열 번도 더 하며 끊임없이 일렁인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그 돌을 가장 많이 던지는 사람이다.
호수랑 내가 속해있는 보드게임 동호회가 있다. 동호회원들 역시 그때 그 아르바이트 시절 만났던 이들이다. 밥을 먹다가 한 회원이 나와 호수에게 "그래서, 너네 남자친구는 있어?"라고 물었다. 호수는 있다고 했다. 엥? 근데 내가 몰랐다고???? 먹던 냉모밀을 뱉어버리고 호수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럼 한 달 정도 됐으려나 혼자 생각했다. 다른 회원들과는 그런 깊은 이야기를 하기가 좀 그러니까 거기서는 대충 얼버무리고 보드게임 장소로 이동 중에 사실 만난 지 조금 오래됐다고 호수가 얘기했다. '흠. 그럼 우리가 3월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때도 아무 내색이 없었으니까.... 한 3개월 됐으려나....' 싶었는데, 작년 말부터 만났다고 했다. 당장 호수의 멱살을 잡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점이 아직도 후회스럽다. 자꾸 올라가려는 손을 붙잡고 얘기를 들어보았다. '지금까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친언니랑 소개해준 사람 말고는 언니가 처음이다. 엄마 아빠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는 것과 '헤어질 것 같아서 굳이 얘기 안 한 것이다'라고 했다. 아오 이걸 어떡하면 좋지?
그럼 내가 '오 그래도 반년이 넘도록 얘기를 안 했지만 호수의 친구 중에서는 첫 번째로 알고 있다~ 오예! 나는 순위 안에 들었어!' 라거나 '어차피 헤어질 거 괜히 심란하게 말 안 할 수도 있지! 우리의 인생엔 결론만이 중요하니까~'라고 여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호수는 나를 뭘로 보는 걸까? 그럼 내가 모르는 호수는 또 얼마나 있는 거고 이때의 호수는 진심이었는지, 또 저때의 리액션은 믿어도 되는 건지에 대해 되짚어보느라 마음을 쓴다는 걸 전혀 모르는 걸까? 신뢰가 얼마나 사소한 일들로 무너지는 지도?
맞다. 호수는 원래 이런 애다. 호수가 첫 회사를 다닐 때, 취업을 했는데 가족에게 말도 안 하고 한동안 그냥 쿠팡 아르바이트하러 간다고 말했던 애다. 그 마음이 뭔지 사실 너무 잘 알겠어서 너무 호수에게 뭐라 하지 못하겠다. 이 상황이 최선이 아닐 것이라는 어떤 작은 마음. 굳이 확정적이지 않은 상황을 털어놓아서 상대방을 신경 쓰이게 하고 본인도 불편함을 겪고 싶지 않은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은 상황에 따라서 배려가 될 수도 있고, 예의가 아닌 게 될 수도 있다. 이번 일은 명백한 후자이다. 호수를 아끼는 사람들과 호수의 남자친구, 그리고 호수 자신에게도.
오늘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얘기한 것뿐이지, 다른 회원이 묻지 않았다면 호수는 과연 언제 내게 얘기했을까.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말하기 더 힘들어질 것이고 그럴수록 호수에게는 더 큰 멱살만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1년을 만나든 갑자기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내밀든 그냥 축하한다며 행복을 빌어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내가 호수를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호수의 일들을 좋아하는 연예인의 연애나 결혼 소식을 기사로 듣는 것처럼 그렇게 접하고 싶지 않다. 당연한 것 아닌가? 호수는 연예인이 아니라 내 친구인데. 그냥 호수의 결정을 응원하고 마냥 멀리서 축하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우린 친구니까!!!!! (다시 생각해도 열받는다.)
호수의 이번 남자친구가 호수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아니어도 상관없다. 말아버리면 되니까. 너무 스스로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좀 아니면 어떻고, 또 별로면 어떤가. 어떤 선택을 하든 간섭하고 응원하고 같이 오래 기억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그게 친구 아닌가. 어떤 세월이든 같이 겪어가는 거.
내게 친구가 적은 이유도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면 될 텐데 그게 잘 안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써도 되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 놓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살아야 하니까. 나는 내 곁에 남아준 최소한의 이들과 함께 있으면서 '유쾌하지 않음'보다는 '유쾌함'을 더 많이 겪고 싶다. 당연히 그들은 나에게 조금의 '유쾌하지 않음'과 다량의 '유쾌함'을 선사해 준다. 이번 일은..... 그냥 날씨가 더우니까.... 날씨 탓으로 돌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