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달구지에서 내려 시를 줍다

시를 끓이는 저녁

by 고요정

**<소달구지에서 내려 시를 줍다>**의 모든 여정.

*1. 떠남에서 시작하여(이 길이 내가 가는 길이라면)

*2. 고독을 견디고(절대적 고독)

*3. 치유를 얻어(구름을 이고 가는 사람)

*4. 사랑을 확인하고(윤기 나는 지팡이)

*5. 마침내 세상에 따뜻한 위로를 건네며(시를 끓이는 저녁)



1. 떠남에서 시작하여(이 길이 내가 가는 길이라면)

[프롤로그] 소달구지가 멈춘 자리, 시(詩)가 찾아왔다

마음밭에 향기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소녀 하나가 해 질 녘 낯선 들길에서 떨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코스모스를 무진장 사랑했던 그 문학소녀는 어디로 갔을까요. 미국에서 이리 오래 살면서도 못내 그리워하던 그 꽃, 그 가녀린 손짓과 비릿하고도 향긋한 '꽃의 입냄새'마저 이제는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치열했습니다. 보스턴의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플로리다의 뜨거운 주방에서도 나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아내라는 이름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 짐을 가득 실은 소달구지처럼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줄도 모르고, 내 영혼의 정원이 말라가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소달구지처럼 삐걱거리던 내 삶이 멈춰 선 순간, 잊었던 시(詩)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더 이상 달릴 힘이 없어 멈춘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려놓아야 할 때임을 알았기에 멈춘 것이었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세상의 의무도 잠시 내려놓고 텅 빈 지평선을 바라보니, 그제야 낮게 뜬 구름이 보였습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코스모스의 향기가, 내 젊은 날의 꿈이 그 구름 위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씁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옷을 벗고, 시인의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부르는 늦깎이 노래입니다.


**이 길이 내가 가는 길이라면**


한참을 지나와서야 돌아본다.

장거리를 달려온 소달구지는 삐걱거리고

입술은 까맣게 타버렸다.


남편도 떨구어내고

자식마저 떨구어내고

하늘의 뜻인지, 땅의 뜻인지 알 길 없어

하늘 맞닿은 지평선만 응시한다.


구름이 낮아 올라탈 수 있겠구나.

가보자, 내 품에 안겨서

오늘도 만져질 듯 만져지지 않는

나의 꿈, 나의 사랑아!


바람이 부는 대로

저리도 무심하게 날아가는

내 사랑아!

**2. 고독을 견디고(절대적 고독)**


절대적 고독, 꺼지지 않는 불꽃


사람과 사람이

마주 보던 시대는 갔다.


성가시게 나를 붙들던 것들,

실은 나를 살게 했던 그 소란스러움을

이제는 모두 떠나보낸다.


시원하고도, 섭섭하다.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내 영혼의 울부짖음.


혼자 밥을 짓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이 시간은

버림받은 시간이 아니다.

내 안의 꺼지지 않는 불꽃을 지키는

절대적인 고독이다.


밤을 지키는 올빼미가

나무에 앉아

말없이 나를 내려다본다.

그래, 너는 알겠구나.

이 어둠 속에서

내가 얼마나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지.





**3. 치유를 얻어(구름을 이고 가는 사람)


**구름을 이고 가는 사람**


길가에 코스모스 피는 가을이면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서 있었다.

가녀린 줄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꼭 나 같아서,

보고 싶어 뒤돌아보고

다시 다가가 얼굴을 가만히 대어 보았다.

그것은 나를 알아가는 첫걸음이었다.


이제 나는 이곳, 플로리다에서 호흡을 다듬는다.

이곳의 숨결은 거칠다.

때로는 모든 것을 삼킬 듯 허리케인이 몰아치지만,

폭풍이 지나간 뒤의 평온은

하늘 가득 솜사탕 같은 구름을 피워 올린다.


그 구름을 머리에 이고 걷는다.

삐걱대던 소달구지 대신

가벼운 구름 한 조각을 이고 가는 시인이 되어.

하늘을 보니 자꾸만 웃음이 난다.

나는 오늘, 절로 새어 나오는 나의 미소를

한 입 베어 문다.

달콤하다.



**4. 사랑을 확인하고(윤기 나는 지팡이)**


윤기 나는 지팡이, 그대!


몸서리치던 사랑과 전쟁은 끝났다.

치열했던 그 시간들은

이제 뒤안길로 조용히 물러났다.


당신의 늙어가는 모습을 알아차리는 게 싫어서

나는 짐짓 고개를 돌리곤 했었다.

허나, 햇살 같던 그대의 금발 가녀린 곱슬머리는

은빛을 지나 어느새 하얀 눈으로 덮여버렸다.


손마디에 기생하는 통증이

야속하게도 맞잡은 손을 툭, 떨어뜨리게 만들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모난 돌이 세월을 견뎌 동그란 조약돌이 되듯

서로를 짚고 일어서느라

서로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내느라

닳고 닳아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우리는 서로의 지팡이가 되었다.

쥐어보면 안다.

내 손에 이토록 저절로 쏘옥 들어오는 것을.


이리도 편안하게 나를 받쳐주는 것을.

그 사랑의 수고가 헛되지 않아

이토록 윤기 나는 하나가 되었으니

내 사랑아,

그대를 만나 참으로 다행이었다.

**5. 마침내 세상에 따뜻한 위로를 건네며(시를 끓이는 저녁)**


[에필로그] 시(詩)를 끓이는 저녁

덜컹거리던 소달구지는 멈췄습니다.

짐칸에 가득했던 의무와 책임,

그 무거웠던 짐들을 다 내려놓고 나니

빈 수레 곁에는 고요한 바람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제 그만 쉴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그 낡은 달구지에서 무엇을 더 바라느냐고.

하지만 나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평생 닳도록 입었던 앞치마 대신

설레는 마음 한 자락을 질끈 동여매고

나는 다시 불을 지핍니다.


이제 내가 짓는 것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밥이 아닙니다.

허기진 마음을 달래줄 시(詩)입니다.


보스턴의 매서웠던 눈보라 한 줌,

플로리다의 뜨거운 태양 한 조각,

그리고 내 늙은 남편의 지팡이에 묻은 손때와

올빼미가 지켜준 밤의 고독을

커다란 솥에 넣고 뭉근하게 끓입니다.


오래 묵힌 된장처럼

내 삶의 신산함이 보글보글 끓어올라

구수한 향기가 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 책은 그렇게 차려낸

나의 소박한 밥상입니다.

먼 길 오느라 고단하셨지요.

입술이 타버린 당신에게,

아직도 무거운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당신에게

따뜻한 시 한 그릇 대접하고 싶습니다.


어서 오세요.

여기, 시가 끓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