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숲에서……
갈 수 없는 곳을 그리워하는 나그네
바람으로 왔다가
심장만 흔들었던
시인이 밉다.
괜스레 서성이게 만든
시인의 향기가
일기장 갈피마다 녹아서
길을 떠나지 못하게
발목을 잡았다.
꽃향기가 처녀 가슴을 부풀리던
그때도
바람에 묻혀온
시인의 영혼이
가슴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다시 떠오르고 싶지 않아서
더 깊이 가라앉는다.
삶이
지금까지
시인을 미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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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자작나무 숲은 언제나 쓸쓸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그 나무들이 마치 삶의 상처처럼 희끗희끗한 몸통을 드러내고 서 있을 때, 나는 그 숲을 헤매는 오랜 나그네가 된다.
갈 수 없는 곳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발목을 잡고, 숲의 고요는 심장을 흔들었던 그 누군가의 빈자리를 더욱 아리게 채운다.
그 '시인'이라는 이름의 바람은, 내 삶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눈부시던 꽃향기가 처녀의 가슴을 부풀리던 그때도, 그는 기어이 내 영혼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왜였을까.
왜 나는 그저 스쳐 갈 바람을 붙잡으려 했으며, 왜 그의 잔향은 이토록 길게 나를 맴돌까.
책상 서랍 깊숙이 잠들어 있던 낡은 일기장을 꺼낸다.
누렇게 바랜 종이의 질감 위로 스치는 손끝에서, 잊었다고 생각했던 시간의 먼지가 되살아난다.
갈피마다 빼곡히 눌러 쓴 글씨 속에는, 차마 지우지 못할 그리움과 함께 한 시절의 애증이 그대로 녹아 있다.
‘괜스레 서성이게 만든 시인의 향기’는, 그렇게 일기장의 매 페이지에 스며들어 나의 발목을 영원히 놓아주지 않는다.
바람처럼 왔다가 심장만 흔들었던 시인을, 나는 기어이 미워한다.
그 미움은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내 삶의 뿌리 깊이 박힌 상흔(傷痕)과 같다.
다시 떠오르고 싶지 않아 더 깊은 침잠을 택하고 싶은 날에도, 이 숲은, 이 낡은 일기장은 기어이 나를 불러 세운다.
자작나무 숲의 고즈넉한 풍경과 낡은 일기장의 바랜 흔적들. 그것들은 그저 풍경이나 사물이 아니다.
닿을 수 없는 곳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의 마음이며, 한 생애를 관통하며 끝없이 미워했던 그 시인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숲과 갈피 속에서, 미워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나의 삶을 다시금 마주한다.
삶이 지금까지, 이토록 아프게 그 시인을 미워하고 있음을.
가닿을 수 없는 그곳을 바라보나니
나그네의 품은 마음 홀로 슬프구나.
바람으로 찾아와 빈 마음 흔들어놓고
원망은 낡은 일기장 갈피마다 스며드네.
꽃향기 드높던 그 옛날의 봄날에도
그대 영혼에 이 내 마음 나락으로 떨어졌네.
다시는 부표처럼 떠오르길 원치 않아
평생을 이토록 그 시인을 미워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