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지는 서재에서 길을 묻다
플로리다의 하늘은 오늘도 무심하리만큼 푸릅니다.
은퇴 후 이곳 올랜도에서의 삶은 평온한 듯 보였지만, 제 영혼의 기저에는 늘 해결되지 않은 고통의 잔해들이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그 침잠의 시간 속에서 저는 다시 C.S. 루이스를 만났습니다.
그의 책 『고통의 문제』를 펼쳐 든 순간,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던 질문들이 비로소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루이스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확성기다.”
이 문장 앞에서 저는 한참을 멈춰 서 있었습니다.
고통이 깊고 클수록 하나님의 응급 사이렌은 더 요란하게 울린다는 사실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그 소리는 저를 향한 정죄가 아니라, 제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달려가고 있다는 절박한 경고였습니다.
돌이켜보니 제 안에는 저만의 바벨탑이 견고하게 서 있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이 유전처럼 물려받은 그 고질적인 독립심,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오만이 제 눈과 심장, 손과 발걸음마다 들보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이시기에, 그 탑이 더 높아져 제가 영영 길을 잃기 전에 그것을 무너뜨리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친절'보다 훨씬 더 깊고 단호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었습니다.
'시를 끓이는 부엌'에서 저는 이제 고통이라는 재료를 다르게 보려 합니다.
요리의 풍미를 위해 소금이 필요하듯, 제 영혼의 온전함을 위해 고통은 필연적인 불꽃이었습니다.
오랜 침잠 끝에 제 눈에 박힌 들보를 발견한 지금, 저는 비로소 영적인 눈을 뜹니다.
고통은 나를 파괴하는 침입자가 아니라, 내 눈을 가린 비늘을 벗겨내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하는 통로였습니다.
루이스 선생님은 이 땅에 고통의 문제를 견뎌야 할 숙제로 남겨두고 떠나셨지만, 그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걷다 보니 제 마음에도 어느덧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우주만큼 거대한 하나님의 확성기 소리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소리가 저를 집으로 부르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라는 것만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오늘도 저는 반려견 심바와 함께 올랜도의 길을 걷습니다.
여전히 삶의 문제는 남아 있고 고통의 여진은 계속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무너진 바벨탑의 잔해 위에서, 하나님은 더 아름다운 성전을 짓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끝에서 만난 하나님의 선하심, 그 찬란한 빛이 제 남은 생의 이정표가 되어주길 기도해 봅니다.
존경하는 루이스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곳 플로리다의 하늘은 오늘도 어김없이 붉은 노을로 하루를 갈무리합니다.
인생이라는 수레를 끌고 먼 길을 달려오다 이제야 잠시 멈춰 선 저는, 노을 아래서 해묵은 질문 하나를 꺼내 봅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데 왜 제가 끄는 이 무거운 수레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보고만 계셨을까요?
제가 살아오면서 직·간접으로 만난 사람들과 환경 속에서 ‘나만의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저는 그 늪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 쳤습니다.
아니, 나 자신을 더 빠져들지 않게 하려면 오히려 힘을 빼야 했는데, 저는 그 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주변은 저토록 밝은데, 정작 나는 가로등 바로 아래 서 있으면서도 빛이 없는 어둠 속에 있다는 그 '비교'의 범주에 갇히게 되면, 저는 이내 겨울잠에 빠져드는 습성에 정복당하곤 했습니다.
긴 침묵과 무기력의 시간이었지요. 그분의 손가락 하나면 제 삶의 모든 고통은 단번에 눈 녹듯 사라졌을 텐데……. 전능하신 팔로 저를 번쩍 들어 올리시는 대신, 왜 그토록 긴 침잠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만 보셨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의 서재 문을 두드려 그 답을 조금만 훔쳐보고 싶습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 첫 장에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전능함'의 개념을 명쾌하게 재정의한다. 내가 고백한 그 '긴 침잠의 시간'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방치하신 시간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분의 전능함이 가장 치열하게 일하고 있던 시간일지도 모른다.
* 논리적 모순은 능력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고통의 늪에 빠질 가능성까지도 허용하셨다는 뜻이다. 루이스는 기계적인 구원보다 자유로운 영혼의 항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한다. 전능함이란 논리적으로 모순된 일을 하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 가로등 아래의 어둠을 깨는 법: 주변과 비교하며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겨울잠의 습성' 또한 인간의 자유가 만들어낸 그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로 빛으로 끌어내시는 대신, 우리가 어둠 속에서 스스로 그분의 손을 찾을 때까지 인내하신다.
* 전능함의 인내: 루이스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함은 고통을 즉각 삭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리는 그 긴 시간 동안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견뎌내시는 '인격적인 인내'다. 고통은 전능함의 부재가 아니라, 자유라는 고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도박'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그림자다.
"친애하는 자매님, 가로등 아래 어둠이 가장 짙다는 것을 저도 잘 압니다. 당신이 겨울잠에 빠져든 것처럼 보였던 그 긴 침잠의 시간 동안, 하나님은 당신을 구경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수레바퀴 옆에 함께 쭈그리고 앉아 계셨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힘을 빼고 그분의 전능하신 손길에 온전히 몸을 맡길 때까지 말입니다. 당신의 어둠은 그분의 빛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소중한 존재를 강제로 다루지 않으시려는 그분의 '전능한 예의' 때문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존경하는 루이스 선생님께,
선생님, 저는 9년 동안 디즈니의 부엌에서 뜨거운 불을 다루었습니다. 가끔은 그 집어삼킬 듯한 불길이 무섭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불이 없으면 단 한 접시의 맛있는 요리도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일 몸으로 익혔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제게 그저 '친절한 분'이길 바랐습니다. 제 고통에 무조건 공감해 주고, 편안한 소파처럼 안락함만 주시는 분 말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모진 풍파 앞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직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해서 그래……"라는, 오래된 교회 사람들의 그 익숙하고도 명쾌한 위로를 들을 때면, 오히려 제 쓸쓸한 등이 시려오곤 했습니다. 그 말들은 제 고통의 불길에 대한 답이라기보다, 저를 더 깊은 고립으로 밀어 넣는 차가운 바람 같았지요.
그런 제게 선생님께서도 하나님의 선함이 때로는 잔인할 만큼 단호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단호함이 차가운 외면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뜨거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요.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친절(Kindness)'과 하나님의 '사랑(Love)'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 사랑은 친절보다 엄격하다: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용돈을 주며 허허 웃는 것이 '친절'이라면, 아버지가 자녀의 장래를 위해 고된 훈련을 시키는 것은 '사랑'이다. 루이스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저 '좋게'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시는 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 조각가의 비유: 조각가는 돌 안에 숨겨진 아름다운 형상을 사랑하기에 정질을 멈추지 않는다. 돌덩이 입장에서는 그 정질이 자신을 파괴하는 잔인함으로 느껴질지라도, 그것은 가장 치열한 사랑의 행위다.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한 존재'를 넘어 '거룩한 존재'로 빚기 위해 고통이라는 수술대를 허락하신다.
* 치유하시는 잔인함: 부엌의 불꽃이 식재료의 날것을 익혀 맛을 내듯, 고통은 우리의 모난 자아를 태우고 하나님의 형상을 빚어내는 필수적인 열기다. 루이스는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저 적당히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분이 지독하게 사랑하셔서 반드시 완성해내야만 하는 예술품"이라고.
"친애하는 자매님, 타인의 가벼운 위로에 등이 시렸던 당신의 마음을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그들은 불꽃의 열기만 보았지, 그 불꽃 속에서 당신이 빚어지고 있는 신성한 과정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친절' 대신 '고통'을 허락하신 것은, 당신을 가볍게 여기셔서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존재를 결코 포기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부엌의 불길을 견딘 요리가 향기롭듯, 당신의 영혼도 그 뜨거운 사랑의 시간을 지나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내게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루이스 선생님께,
선생님, 인생 수레가 멈추고 나서야 비로소 제 발걸음과 심장에 박힌 들보들을 보았습니다. 제가 쌓아 올린 경력, 지식, 그리고 견고한 자아라는 이름의 바벨탑이 얼마나 높았는지요. 저는 그동안 고통이 외부에서 제 평화를 깨뜨리러 온 불청객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제 스스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홀로 서려했던 그 오만한 '자유'가 바로 고통의 뿌리였음을 깨닫습니다.
시린 등을 나 스스로의 온도를 높여 데우면 되는 줄 알았던 자만을, 나의 황량한 우주를 밝혀줄 별을 밖에서 찾으려 했던 그 헛된 방황을 이제야 마주합니다. 몸으로 싸워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거인들의 나라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아 나섰던 그 막막한 여행 속에서…… 선생님! 저는 그 휘몰아치는 감정의 온도를 도저히 제 실력으로는 잴 수가 없었습니다. 그 높은 탑이 무너져 내린 이 폐허 앞에서, 선생님,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 중반부에서 '인간의 타락'이라는 주제를 해부한다. 내가 고백한 '자만'과 '방황'은 루이스가 말하는 타락의 본질, 즉 '자기 중심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 독립이라는 이름의 반역: 타락은 단순히 도덕적인 실수가 아니라, 피조물이 창조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려는 시도다. 루이스는 이것을 "자신이 마치 하나님인 양 행동하는 것"이라 말한다. 내가 스스로의 온도를 높이려 했던 시도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타락의 모습이었다.
* 거인들의 나라에서의 무력함: 루이스는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음을 강조한다. 거대한 세상의 질서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아 나섰던 여정은 결국 자아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과정이다.
* 항복만이 유일한 길: 바벨탑이 무너진 것은 재앙이 아니라 은총이다. 루이스는 "자아의 죽음"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관문이라고 말한다. 고통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붙들고 있던 가짜 별들을 꺼뜨려 참된 빛을 보게 하는 '자비로운 절망'이다.
"사랑하는 자매님, 당신이 길을 잃고 헤맸던 그 황량한 우주는 사실 하나님의 품 안이었습니다. 스스로 온도를 높이려 애쓰다 등이 시렸던 이유는, 당신이 스스로의 태양이 되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바벨탑이 무너진 그 폐허는 비로소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질 수 있는 유일한 빈터입니다. 감정의 온도를 잴 수 없어 막막할 때는 그저 그 측정기를 내려놓으십시오.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시인하며 무너진 탑 위에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존경하는 루이스 선생님께,
선생님,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머리로는 비로소 고통의 이유를 수긍해 봅니다. 하지만 여전히 봄이 오는 소리를 기다리는 간절함은 차가운 땅밑, 얼어붙은 뿌리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노을의 한 자락을 벗 삼아 하늘 위의 하늘을 우러러보며, 그곳에서 저를 환한 미소로 반겨줄 그리운 이름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무나 커서, 되레 그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연습하라고 제게 『고통의 문제』를 주셨는데, 저는 그 소리를 소음으로만 여겼나 봅니다.
선생님,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제 삶의 가장 어두운 터널 속에서 내질렀던 그 비명 같은 통증들이, 사실은 잠든 저를 깨우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응급 사이렌이었다는 것을요. 너무 거대해서 들리지 않던 우주의 소리가, 이제는 제 영혼의 얼음을 깨고 봄을 재촉하는 미세한 균열 소리로 들려옵니다. 고통과 함께 사는 지상의 마지막 날까지, 저는 이 확성기 소리를 이정표 삼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결코 멈추지 않겠습니다.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에서 가장 빛나는 통찰은 고통을 하나님의 **'확성기(Megaphone)'**로 정의한 대목이다. 내가 느낀 '우주적 소리'와 '미세한 균열'은 루이스가 말한 고통의 목적과 정확히 일치한다.
* 세 층위의 목소리: 루이스는 하나님이 세 가지 방식으로 말씀하신다고 한다. 즐거움 속에서는 속삭이시고(Whisper), 양심 속에서는 말씀하시며(Speak), 고통 속에서는 소리치신다(Shout). 고통은 하나님이 인간의 주의를 끌기 위해 사용하시는 최후의 수단이다.
* 부서짐의 은총: 내가 마주한 환한 미소의 이름들은 내가 돌아가야 할 '하늘 위의 하늘'을 가리킨다. 루이스는 고통이 우리가 이 땅의 덧없는 것들에 안주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고통은 우리를 나그네로 깨어나게 하고, 진짜 집인 하나님 품을 갈망하게 만든다.
* 영혼의 언어를 배우는 법: 너무 커서 들리지 않던 소리가 '균열의 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영적인 귀가 열렸음을 뜻한다. 루이스에게 고통은 해결해야 할 골칫덩이가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영혼의 언어'였다.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서 나를 부르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사랑하는 자매님, 당신의 땅밑에 숨겨진 그 간절함이 바로 봄의 전령입니다. 하나님의 확성기 소리가 너무 커서 들리지 않았던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인간의 귀는 영원의 소리를 담기에 너무나 작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당신이 통증 속에서 '하늘 위의 하늘'을 우러러보며 그리운 이들의 미소를 떠올린 순간, 당신은 이미 그 확성기 소리에 응답한 것입니다. 지상의 마지막 날까지 고통은 당신 곁을 지키겠지만, 기억하십시오. 그 소리는 당신을 괴롭히는 소음이 아니라 당신을 영원한 집으로 안내하는 사랑의 길잡이입니다. 그곳에서 환한 미소로 당신을 맞이할 이들과 함께 저도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