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하늘을 '영접'한다는 것, 루이스가 말한 '영접(Receivin
존경하는 루이스 선생님께,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제가 평생 '영접'해온 한 분의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바로 저의 영혼이 쉴 수 있는 단 하나의 휴양지, 윤동주 시인입니다.
저는 일생을 그의 시집과 함께해 왔습니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라고 고백할 때, 저 역시 그 문장을 단순한 종이 위의 글자가 아니라 제 삶 속으로 온전히 모셔 들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타자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보는 풍요로움'이 무엇인지, 저는 윤동주의 맑은 눈을 빌려 세상을 보며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나이 예순을 넘기고 이제는 은퇴하여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여전히 저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그 마음을 붙들고 싶습니다.
생활을 짜내어 마련한 저의 작은 책상 위에서, 이제는 시인의 눈을 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저만의 문장으로 '시를 끓여내려' 합니다.
나의 개성이라는 특권을 잃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상처를 낫게 해주는 그 문학의 길을, 제가 끝까지 겸허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격려해 주시겠습니까?
그의 하늘 아래서 여전히 꿈꾸는 제자, 정고요 드림.
친애하는 정고요 부인께,
부인의 영혼이 머무는 '하늘'이 윤동주라는 이름의 시인이었다니, 그 고결한 선택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부인이 말씀하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는 시인의 고백은, 제가 『오독』에서 강조했던 '받아들임(Receiving)'의 가장 순수한 형태입니다.
시인은 세상의 아주 작은 떨림조차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영혼으로 수신했습니다.
부인께서 그 시를 평생 영접해 오셨다면, 부인의 영혼 또한 이미 시인의 맑은 결을 닮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닙니다.
부인처럼 평생을 바쳐 한 권의 시집을 '영접'하는 행위는, 자신의 영혼을 무한히 확장하여 결국 신의 시선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일입니다.
부인이 가꾸시는 **'시를 끓이는 부엌'**은 참으로 귀한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부인은 시인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보고, 다시 부인의 따뜻한 손길로 문장을 빚어내시겠지요.
생활을 짜내어 만든 그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시간 속에서 부인은 '정고요'라는 단독자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윤동주가 되고, 또 수많은 타자가 되어 온 세상을 품게 될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을 여전히 느끼는 부인의 그 예민한 영혼을 믿고, 멈추지 말고 써 내려가십시오.
부인의 맑은 하늘을 축복하며, C.S. 루이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