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메라 여사와 나의 빈 양동이

올랜도 K-마트 상륙작전 & 군고구마 비망록

by 고요정

키메라 여사와 나의 빈 양동이: 올랜도 K-마트 상륙작전 & 군고구마 비망록


올랜도의 태양은 프라이팬 위의 버터처럼 아스팔트를 녹여버릴 기세였다. 그 이글거리는 주차장 한복판에서 키메라 여사는 흡사 전장으로 향하는 여전사처럼 카트를 부여잡고 서 있었다. 작고 다부진 몸, 단단히 묶은 파마머리, 그리고 불타는 눈빛. 그녀의 별명은 괜히 '키메라'가 아니었다. 십수 년 전, 이름뿐인 슈퍼에서 시든 깻잎 서너 장 보고도 눈물 찔끔 짜던 시절을 견뎌온 올랜도 아줌마들의 '대표 선수'였다.


1. 병목현장 속, 키메라의 개척정신

"야, 에스더 엄마! 뒤처지지 마! 저기 봐, 입구가 병목현상이야. 이럴 땐 작은 몸뚱이가 재산이라니까!"

오픈 두 달째에도 인파는 여전했다. 미 전역에서 제일 크다는 대형 마트의 입구는 흡사 봇물 터진 댐처럼 쏟아져 들어가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는 안전요원들로 아수라장이었다. 덩치 큰 미국인들 틈바구니에서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우왕좌왕하는 순간, 키메라 여사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이모님, 먼저 가세요! 제가 짐 들어드릴까요?"

덩치 큰 한인 청년에게는 애교 섞인 잔소리로 길을 뚫고, 서양인 부부 사이에는 유모차인 척 카트를 밀어 넣으며 슬금슬금 파고들었다. 나는 그녀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그녀의 작은 몸뚱이는 말 그대로 'K-이민자들의 개척정신' 그 자체였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마다 좁은 길이 뻥 뚫리는 기적을 보았다.


2. 군고구마 냄새에 흐려지는 눈물샘

드디어 입성이다! 에어컨 바람이 훅 끼쳐오는 순간, 코끝을 스치는 짙고 달콤한 냄새.

"킁킁, 이거 무슨 냄새지? 어머! 군고구마다!"

키메라 여사가 홀린 듯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마트 한구석에선 진짜 군고구마를 팔고 있었다. 샛노란 속살을 드러낸 채 김을 모락모락 피우는 군고구마를 보자마자, 아줌마들의 눈은 일제히 촉촉해졌다. 그 달콤한 향기는 단순한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십수 년 전 고향의 겨울밤, 엄마가 내어주던 따끈한 군고구마의 추억이었다.

"야, 에스더 엄마. 저거 봐. 다들 개코보다 더 빠르게 달려드는 것 좀 봐. 별것도 아닌 군고구마 냄새에 이렇게 서글퍼질 일이야?"

키메라 여사의 눈시울도 살짝 붉어져 있었다. 굶주렸던 건 비단 한국 먹거리뿐만이 아니었다. 고향의 냄새, 고향의 정, 잊고 지냈던 '한국인의 자리'에 대한 허기였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주책없이 울컥하는 마음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3. 빈 양동이, 그리고 채워지는 마음

결국 우리의 카트에 담긴 건 별것 없었다. 오픈 세일 중인 붉은 고춧가루, 흰 쌀, 그리고 아이들 먹일 과자 부스러기 몇 봉지. 키메라 여사의 '작은 몸뚱이'로 사수해 온 카트는 여전히 텅 비어 있는 '빈 양동이' 같았다.

"야, 이거 봐라. 이 넓은 마트를 다 휘젓고 다녀도 결국 담는 건 똑같네. 그래도 고맙다, 얘. 이렇게 커다란 마트가 우리 동네에 생겨줘서."

투덜거리는 키메라 여사의 목소리에는 묘한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은 거창한 물건이 아니었다. 올랜도라는 낯선 땅에서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희미하지만 굳건한 희망 한 조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주차장으로 나오며 백미러로 본 마트 건물은 거대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건물 속, 뜨거운 군고구마 냄새에 서글퍼하면서도 꿋꿋이 제자리를 지켜내는 '키메라 여사'와 '나' 같은 이민 아줌마들의 웃픈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