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여자가 된다는 것, 남의 나라에서 받은 신분증**
* 장독대와 슈퍼볼 사이*
나는 뼛속까지 'K-여자'다. 한국인의 입맛에 길들여졌고, 우리말의 정겨움에 사무쳐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고유 한글로 이름을 지어 불렀다. 그렇게 사랑했던 모국어를 뒤로하고 영어를 쓰는 세상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그 흔한 "I am sorry", "Excuse me"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이곳은 옷깃만 스쳐도, 아니 공기만 닿아도 "Excuse me"를 연발하는 유별나고 호들갑스러운 세상이었다.
월마트 계산대 줄에 서 있을 때였다. 내 차례를 기다리는데, 앞사람과 점원이 계산하다 말고 서로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날씨 이야기로 시작된 소소한 스몰토크는 점점 진지한 안부 묻기로 변해갔다. 내 뒤에서는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는데, 저들은 태평하다.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다들 익숙한 풍경이라는 듯. 결국 맨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른 줄로 옮겨 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K-여자의 성급함을 내려놓는 법을 처음 배웠다. 기다림도 생활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첫 번째 관문이었다.
K-여자의 사고방식은 집안에서도 삐걱거렸다. 정적인 한국적 정서 탓에 아이들의 사교 문화가 낯설기만 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주말에 친구 집에서 '파티'를 한다고 했다. 고작 아이들 몇 명 모여 노는 것에 거창하게 파티라니. 처음엔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지는 줄 알고 걱정부터 앞섰다. 생일파티야 그렇다 쳐도, 별것 아닌 일에도 모두가 흥분하고 기대를 쏟아붓는 이들의 유별난 '파티 문화'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 파티가 주말마다 끊이지 않는 진짜 미국을 겪게 된 건, 미국인 남편과 재혼하면서부터다. 내가 목격한 미국인들의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정신 나간 모습은 미식축구 결승전, **'슈퍼볼(Super Bowl)'**을 하던 날이었다.
칩(Chips), 치킨 윙, 셀러리 스틱, 콜라...
내 눈엔 끼니도 안 되는 것들을 잔뜩 쌓아두고 남편은 세상 진지하게 파티를 준비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남편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Fuc... fuc... Shit..."
내 눈엔 그저 쫄바지를 입은 거구들이 엉덩이만 보여주다가 갑자기 "요이 땅!" 하고 부딪히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 남편은 난리가 났다. 두 팀이 서로 엉덩이를 맞대고 웅크리고 있다가 다리 사이로 공을 패스하는데, 그게 무슨 대단한 작전인 양 관중과 시청자가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저 미국 사람 혼자 미쳐 날뛰는데, 우리는 그 자리에 함께했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가족이니까.
누가 이기건 간에, 그날이 미국 전역에서 가장 거대한 고함이 발포되는 날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디즈니 주방에서 맞이한 슈퍼볼은 거실의 풍경과는 차원이 다른 '재난'이었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는 순간, 주방은 전쟁터로 돌변했다. 주문서가 출력되는 기계는 쉴 새 없이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종이를 토해냈다. 홀(Hall)에 있는 바(Bar)에서는 대형 스크린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의 함성으로 지붕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데, 주방 안은 뜨거운 기름 냄새와 고함으로 가득 찼다.
세상의 모든 닭이 이날만을 위해 날개를 달고 태어난 것 같았다. 튀겨지기가 무섭게 양념에 버무려진 치킨 윙들이 접시에 담겨 날아갔다. 관중들은 화면 속 선수들을 뜯고, 식탁 위 치킨을 뜯었다.
불이 난 건 주방의 화구가 아니라 요리사와 핸들러(음식 운반 담당)의 손과 발바닥이었다. 미친 듯이 튀기고, 담고, 뛰었다. 누군가 터치다운이라도 하면 주방의 속도는 더 빨라져야 했다. 동료들과 나눌 대화조차 사치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털릴 것이라는 걸. 늘 그랬던 일이니까.
다음 날 새벽, 폭풍이 지나간 주방은 말 그대로 '털려' 있었다.
새벽 조가 출근해 냉장고와 창고를 이 잡듯이 뒤져도 남은 재료가 하나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구석에 숨겨두었던 비상 식자재마저 간밤의 슈퍼볼이 싹쓸이해 가버렸다. 그놈의 슈퍼볼이 치킨에 날개를 달아 주방의 영혼까지 털어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 또한 예상했던 일이기에. 결국 그날 아침 메뉴는 재료가 없어 속 빈 강정처럼 흉내만 낸 음식들로 채워야 했다.
K-여자의 눈에 들어온 미국 사회는 그렇게 차곡차곡 낯선 사진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내가 한국 사람인지 미국 사람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입맛만큼은 지독하게 정직하다.
연애 시절 사랑으로 먹어주던 한국의 매운맛을 미국 남편은 이제 나이가 들었다며 힘겨워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더 강렬하게 김치와 된장의 원형으로 회귀했다.
장독대가 풍기는 쿰쿰하고 깊은 맛. 그 맛을 담은 내 영혼을 잊을 수 없어, 나는 오늘도 화려한 윙과 셀러리 사이에서 묵묵히 한국의 맛을 그리워하며 이곳에 매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