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판타지(Disney Fantasy), 그 화려한

샐러드를 김치처럼 씹던 밤

by 고요정


10여 년 전의 일이다. 어느 날 남편이 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회사에서 받은 특별한 혜택(Perks at work)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에서 막 건조를 마치고 미국으로 넘어온 디즈니의 야심작, ‘디즈니 판타지(Disney Fantasy)’ 호의 시범 운항 티켓이었다. 첫 번째 항해는 전 세계 최고위 임원들을 위한 것이었고, 두 번째 항해는 그 거대한 배를 띄우기 위해 헌신한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상업 운항을 시작하기도 전, 선택받은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남편 덕분에 나 역시 그 화려한 배에 올랐다. 대우는 가히 최고였다. 눈부신 샹들리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준비된 완벽한 서비스. 모든 것이 꿈만 같아야 했다.


선상 극장에서는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이 무대에 올랐다. 수천 명의 관객이 그의 입담에 자지러졌다. 특히 입술을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양한 캐릭터의 목소리를 내는 복화술사는 압권이었다고들 했다. 그렇다. ‘했다고들’ 한다. 나는 그 순간, 그 거대한 웃음의 파도 속에서 홀로 표류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함성이 커질수록 나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다들 배를 잡고 웃는데 나만 무표정하게 있으면, 혹시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영어를 못 알아듣는 동양 여자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이 아닌 경련에 가까운 미소였다.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억누르며, 나는 군중 속에서 철저히 혼자였다.

밤이 되자 무도회가 열렸다. 드레스를 차려입고 나갔지만, 그곳의 공기는 나를 밀어내는 듯했다. 무대 위에서는 ‘캐리비안의 해적’ 잭 스패로우가 화려한 쇼를 펼치고 있었고, 사람들은 음악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나는 그 리듬에 섞여들 수 없었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그 화려한 조명이 나를 비출수록 나는 더 작아지고 투명해지는 기분이었다.

만찬 시간, 테이블 위에는 우아한 코스 요리가 차려졌다. 웨이터는 불어로 된 긴 메뉴 이름을 읊으며 요리를 설명했지만, 접시 위에 놓인 건 아주 조금의, 밋밋하기 짝이 없는 음식뿐이었다. 느끼한 속을 달래줄 무언가가 절실했다. 결국 나는 그 우아한 코스 요리를 뒤로하고 샐러드바로 향했다. 아삭한 채소를 씹으며 김치를 상상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디즈니 크루즈에서 내가 찾은 유일한 위안이 고작 상상 속의 김치라니.


그 시각, 남편은 물 만난 고기 같았다. 배를 건조한 독일의 유명 엔지니어들, 배의 인테리어를 담당한 아티스트들과 어울리며 이야기에 꽃을 피웠다. 신나서 떠드는 남편을 바라보며 나는 묘한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 짝이 아닐까?’ 그가 누리는 세상과 내가 견디는 세상 사이의 거리가 태평양보다 넓어 보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여행이 끝난 뒤의 내 모습이었다. 한국인 지인들을 만나면 나는 그날의 고독과 씁쓸함은 쏙 빼놓고, 목에 힘을 주며 이야기했다.

"아니 글쎄, 아직 일반인에게 공개도 안 된 디즈니 판타지 호를 탔지 뭐야. 임원들 다음으로 우리가 탔다니까."

그들의 부러움 섞인 탄성을 즐기며 나는 의기양양해했다. 그 순간의 내가 참 슬펐다. 영어를 못 알아들어 바보처럼 웃기만 했던 나, 김치가 그리워 샐러드를 씹던 나는 숨기고, 남편의 성취를 내 것인 양 포장하는 나. 그 화려한 배는 내게 꿈과 환상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이민자로서의 내 위치와 서글픈 이중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비춰준 거울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거울 속에 비친 내가 짠하고 가여워서 안아주고 싶다.

샐러드 바에서 김치를 상상하며 아삭거리는 양상추를 씹던 그 여자에게, 영어를 못 알아들어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고 자책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낯선 땅, 낯선 언어 속에서 남편의 기를 살려주려 최선을 다해 그 자리를 지킨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애썼다고. 그 허세마저도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당신만의 방패였노라고.

그때의 치열했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화려한 파티보다 고요한 내 부엌에서 끓이는 된장찌개의 평화를 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비록 그 배 위에서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내 인생이라는 항해의 키는 이제 내가 단단히 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