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의 겨울을 녹인 뜻밖의 전갈

마지막 잎새가 진 자리, 다시 피어난 백합 한 송이

by 고요정


남편과 나에게 남은 마지막 부모님,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 어느덧 일 년이 흘렀다. 다시 돌아온 보스턴의 겨울은 여전히 시리고 하얗겠지만, 올해 우리는 그곳에 가는 대신 우리만의 작은 성탄절 밤을 맞이했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 꽁꽁 얼어붙은 보스턴의 땅에 어머니를 묻고 돌아오던 길을 기억한다. 살을 에던 바람과 낯선 이국땅의 장례식, 그리고 백인들 틈에서 철저히 이방인이었던 나. 나를 품어주던 부모 세대가 모두 사라졌다는 상실감은 마치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진 빈 가지처럼 나를 위태롭게 했다.

하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 상처 입은 마음 위로 다시 눈이 내린다. 조용한 거실에 앉아 시어머니를 생각하고, 또 멀리 계신 나의 친정엄마를 떠올려 본다. 부모라는 거대한 지붕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가 서로의 지붕이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그렇게 담담히 그리움을 달래던 우리에게, 선물 같은 소식이 도착했다. 첫째 딸아이가 엄마가 된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작년 장례식장에서 들고 왔던 하얀 백합 한 송이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주신 마지막 선물이라 여겼던 그 꽃은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사실은 이어지는 생명의 약속이었을까. 한 시대가 저물고 나면 반드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자연의 섭리가 가슴을 뭉클하게 적셨다.

어머니의 캔버스 속에 머물던 케이프 코드의 풍요로운 식탁처럼, 이제 우리도 새로운 생명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나를 품어주었던 부모님의 사랑을 이제는 내가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이어 줄 차례다.

보스턴의 추운 겨울 끝에 찾아온 이 기적 같은 소식은, 슬픔에 멈춰 있던 나를 다시 앞을 향해 걷게 한다. 이제는 안다. 사랑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눈망울 속에, 그리고 새로 피어날 생명의 숨결 속에 다른 모습으로 계속 머무른다는 것을.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작년보다 훨씬 따뜻하다. 내 곁에 남은 이들과, 곧 우리 곁으로 올 작은 생명을 기다리며, 나는 마음속에 다시 한번 하얀 백합을 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