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월드에 떨어진 고춧가루 며느리의 생존기
보스턴 시누이 집 정원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영화 <위대한 개츠비> 촬영장에 잘못 들어온 줄 알았다.
완벽하게 세팅된 수영장, 그 위로 흐르는 밴드의 라이브 연주, 그리고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유려하게 흐르는 사람들. 시동생의 약혼 파티였다. 그들은 그 악명 높은 '스몰 토크(Small Talk)'의 달인들이었다. 날씨 이야기 하나로 30분을 우아하게 떠들 수 있는 그들의 세련됨 앞에서, 나는 그저 '스몰(Small)'해지다 못해 소멸할 지경이었다.
언어에 기죽고, 길쭉길쭉한 외모에 기죽고, 무엇보다 그 '태생적 여유'에 기죽은 나는 바위틈에 낀 이끼처럼 투명 인간이 되고 싶었다.
'제발 나에게 말을 걸지 말아 주세요. 그냥 배경화면 1로 남게 해 주세요.'
속으로 "살려주세요!"를 수백 번 외쳤지만, 햇살 아래 춤추는 금발의 물결은 야속하게도 너무나 눈부셨다. 내 눈엔 그곳이 딴 세상, 아니 천국 같았다.
주인공인 두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키스할 때는 배경음악이 깔리는 듯했다. 그들은 약혼식 후 하와이로 떠났다. 세상의 모든 근심을 내려놓은, 그야말로 이완된 삶의 절정이었다.
그리고 1년 뒤, 다시 날아온 초대장.
"결혼합니다. 멕시코 칸쿤에서. (추신: 신부는 바뀌었습니다.)"
응?
그때 그 천국을 향해가던 커플은 어디 가고, 시동생은 그사이 새로운 인연을 만나 칸쿤에서 결혼식을 올린단다. 하객들은 미국 각지에서 크루즈를 타고 칸쿤으로 집결하라는, 참으로 할리우드스러운 통지였다.
솔직히 부러웠다. 그 넉넉함이, 그 자유분방함이, 그리고 인생을 축제처럼 즐기는 그 태도가.
하지만 우리 가족은 정중히 불참을 알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버터와 고춧가루는 섞이기 힘든 법이니까.
생각해 보시라. 경상도 산골짝, 하늘 아래 첫 동네로 시집가서도 적응 못 해 눈물 콧물 쏟았던 나다. 깡촌 시골살이도 버거워했던 내가, 이 화려한 '버터 월드'의 크루즈 파티를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남편의 배려 덕분에 요란한 사교계 데뷔는 피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는 깍두기 국물 뚝뚝 떨어지는 고춧가루 인생이라는 걸.
그런데 참 이상하다. 예전 같았으면 초라함을 느꼈을 텐데, 이제는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하며 껄껄 웃게 된다. 그토록 완벽해 보였던 1년 전의 약혼도 흩어지는 걸 보며 깨달았다. 화려한 겉포장지가 행복을 보장해주진 않는다는 것을.
나이가 든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젊음의 탱탱한 피부는 잃었지만, 대신 웬만한 바람에는 흔들리지 않는 두둑한 뱃심과 뻔뻔함을 얻었으니까.
누군가 "다시 그 젊은 날로 돌아가겠냐"고 묻는다며 내 대답은 단호하다.
"절대 아니요(Absolutely NOT)!"
치열하게 사느라 맵고 짰던 내 시간들을 되감기 하고 싶지 않다. 그 맵디매운 시간을 견뎌내고 얻은 지금의 평온함. 이것이야말로 버터 바른 빵보다 더 깊은 맛을 내는, 내 인생의 진짜 보석이자 상급이 아닐까.
[작가의 한마디]
"촌스러웠던 지난날의 아픔을 뒤로하고, 저와 세 아이를 넓은 가슴으로 품어준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이 글은 고춧가루 같은 제가 낯선 '버터 세상'에서 그 넓은 품에 기대어 겪어낸 치유와 성장의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