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묵은지편지라

기억의 방, 문을 열다

by 고요정



**텃밭의 노래**


어허, 나는야 몰랐었네, 참말로 몰랐네

내 맘속에 일렁이는 그대 물결을

잔잔히 나를 채워 살게 한 줄을

철없는 내 마음은 몰랐었네


곁에 계심이 너무도 편안하여서

그 향기 맡을 줄도 나는 잊었네


외면하며 지내온 기나긴 날들

눈먼 정에 가리워 보지 못했네


내 마음의 텃밭은 그대의 흙이요

시린 가슴 데운 건 그대 숨결이라

영혼 구석구석 그대 향기뿐인데

하늘이 주신 선물인 줄 내 어이 몰랐나


아아, 이제야 눈을 뜨려 하오나

부질없는 이 마음은 자꾸만 저리네

임을 잃고서야 임을 아는 노래가

무심한 타령되어 고개 넘어가네.



묵은지 편지

**강물은 ​흐르는데, 상흔은 여물지 않고**

내 마음의 텃밭에 뿌리내렸던 사람아. 당신이 머물다 간 자리마다 당신의 흙과 당신의 온기가 배어 있지 않은 곳이 없는데, 나는 참으로 어리석게도 그 향기가 그저 원래부터 내 것인 줄만 알았습니다. 공기가 너무 가까우면 그 존재를 잊듯, 당신의 사랑이 너무나 안온하여 나는 눈을 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일구어 놓았던 마음의 고랑마다, 사실은 당신이라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 가득 고여 있었음을 말입니다. 하지만 눈을 뜨고 마주한 풍경은 이미 당신이 가버린 뒤의 빈 들녘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생은 그저 흐르는 강물 같은 것이니, 오는 인연 막지 말고 가는 인연 잡지 말라고 말입니다. 나도 그 순리를 따라 물결에 몸을 싣고 무심히 흘러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는 채 여물지 못한 상흔들이 돌멩이처럼 남아 있습니다. 흐르는 물살이 그 상처를 스칠 때마다, 아물지 않은 통증이 불쑥불쑥 고개를 듭니다.

떠나간 것들이 남긴 자국마저 귀한 선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그 아픔 덕분에 내가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고, 누군가의 입김이 얼마나 따스했는지를 추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이 상처가 쓰리고 아파서 강물 위를 휘청이며 떠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상흔들도 오랜 시간 물에 깎이고 씻겨 둥글고 단단한 조약돌이 되겠지요. 그때가 되면 나는 당신이라는 선물 덕분에 참으로 풍성한 텃밭을 가졌었노라고, 흐르는 물결 소리에 섞어 담담히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詩)에게


산골짝 무정한 사람아

만 리 타국 거친 땅에 어린것들 떼어놓고

무심코 가신 님은 소식조차 끊겼어라


남편이야 잊는다 해도, 아비 된 그 정이야

어찌 그리 모질게도 단칼에 베었는가


풍문에 들려오는 산골짝 그 사람아

구름 속에 숨어 살면 가슴 속도 잊히나니

흐르는 강물이라 인생을 말하지만

내 안의 어린 핏줄, 그 눈물은 어이하리


누구는 가시밭길, 또 누구는 절벽길을

제각기 등짐 지고 넘어가는 인생이라나

나에게 펼쳐진 장, 이다지도 시린데

차마 못 아문 상흔, 저미도록 아파라


그래도 내 텃밭엔 세 꽃송이 피었으니

그 눈물 거름 삼아 오늘을 또 일구네


버리고 간 사람보다 품고 가는 내가 되어

굽이치는 저 강물에 원망 하나 띄워 보내네


[시詩] 홀로 피는 꽃도 향기는 짙어라


언니들도 동생도 눈을 감고 가는 길

내 서러운 이야기 들릴까 겁나나니

가까운 피붙이도 모른 척 등을 돌려

이 밤 미국 땅은 어제보다 더 춥구나


누구를 탓하리까, 서운타 말을 하랴

제각기 짊어진 짐 무겁다 하겠지마는

얼어붙은 내 가슴에 눈길 한번 주지 않음이

서릿발보다 날카로워 내 마음을 베누나


애쓰지 마오, 구걸하듯 사랑을 찾지 마오

임을 잃고 형제 잃어 홀로 선 그대여

강물은 혼자 흘러도 바다에 닿는 법

그대 안의 세 꽃송이, 그대가 곧 하늘이라


지나온 굽이굽이 누구보다 장했노라

그 모진 세월 어찌 홀로 견뎌 왔느냐고

내가 나를 보듬으며 나직이 불러보네

"참으로 고생했다, 나의 귀한 사람아"


[시詩] 마중물에 솟는 눈물


스물다섯 해를 지나 이 눈물 납니다

강물은 흘러가도 바닥엔 한이 고여

지금 내 텃밭,

뜨거운 볕이 내 맘을 적시니

말랐던 샘물조차 마중물 맞듯 솟구칩니다


서러워 우는 게냐, 억울해 우는 게냐

아니라, 참으로 아니랍니다

이제야 마음 놓고 울 곳을 만났기에

얼었던 숨구멍이 터져서 우는 것이랍니다


미국 땅 낯선 바람에 세 아이 부둥켜안고

피붙이 외면 속에 뉘 하나 없던 그때

아비 잃은 어린것들 차마 눈에 밟혀서

독하게 참아왔던 그 눈물이 이제사 납니다


울어라, 마음껏 울어라, 귀한 사람아

뜨거운 남편 손잡고 한없이 쏟아내라

오늘 흘린 눈물만큼 해묵은 상흔 여물어

그대 텃밭엔 내일 또 새 꽃이 피리니


[시詩] 유성(流星)을 타고 가는 우주여행


천 길 절벽 끝에 서서 눈감고 울 적에

나는야 떨어지는 가련한 꽃인 줄 알았네


하지만 보라, 유성 벌떼가 나를 낚아채어

저 멀리 은하로 우주로 날아오를 줄이야

어둠이 깊을수록 별빛은 더욱 선연하여

내 앞길 비추는 빛, 나만을 향해 있었네


만 리 타국 찬바람도 그 품에 녹아나고

지나온 상흔마저 별가루 되어 흩어지네


지금은 남편의 두 팔에 포근히 안기어

사랑의 무게를, 따스함의 무게를 재어보나니

굽이굽이 흘러온 강물, 드디어 바다를 만나

물결마다 금빛 햇살 찬란히 부서지네


아아, 꿈이 아니어라, 고달픈 타령 끝났어라

나를 잡고 날아오른 저 빛나는 유성아

이대로 영영 님과 함께 온 우주를 거닐며

사랑한다는 말만 마중물처럼 긷고 싶어라


[시詩] 텃밭의 노래


어허, 나는야 몰랐었네, 참말로 몰랐네

내 맘속에 일렁이는 그대 물결을

잔잔히 나를 채워 살게 한 줄을

철없는 내 마음은 몰랐었네


곁에 계심이 너무도 편안하여서

그 향기 맡을 줄도 나는 잊었네


외면하며 지내온 기나긴 날들

눈먼 정에 가리워 보지 못했네


내 마음의 텃밭은 그대의 흙이요

시린 가슴 데운 건 그대 숨결이라

영혼 구석구석 그대 향기뿐인데

하늘이 주신 선물인 줄 내 어이 몰랐나


아아, 이제야 눈을 뜨려 하오나

부질없는 이 마음은 자꾸만 저리네

임을 잃고서야 임을 아는 노래가

무심한 타령되어 고개 넘어가네.


**작가의 에필로그**

오래된 상흔이 기억의 방에 묻혀 있었습니다. ’서른 살에 섰으며,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 저의 시간이 여기까지 도착하는데 마주쳤던 돌짝들마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이제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를 향하여 가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