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땅의 순례자가 C.S. 루이스에게 묻다

심연의 쓰나미 앞에서: 루이스와의 대화

by 고요정

[프롤로그]

우리는 모두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 흐름이 너무 빨라, 내가 '사람'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는지 현기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예전 수첩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짧은 글귀 앞에서 저는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사람으로 살아낸다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 흙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저의 고백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화려한 게임 사운드와 사이버 세상의 함성 속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아날로그적 감성에 대한 슬픔이었을 겁니다.

인생이라는 바다 심연, 그 깊은 곳에 숨겨진 쓰나미를 감지했던 날. 저는 마음속의 스승인 C.S. 루이스에게 말을 걸고 싶어 졌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제가 남긴 메모이자, 오늘을 사는 제가 영원한 본향을 그리워하며 띄우는 편지입니다.


오래된 메모를 펴봅니다

사이버 세대와 온전한 자연 세계와의 삶으로 살아가는 현장은 통로가 없는 섬나라 이야기로 되었다.

낙엽을 밟는 소리보다 게임을 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감탄사들은 우리들의 예전 동네 골목길에서 들리던 그 함성보다 더 찐하다.

무릇 인생이란 ,

사람으로 살아내라는 것 일 텐데.

한평생을 사람으로 살아낸다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 땅바닥에 얼굴을 묻고 흙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여정이 여하튼 바다 심연에 감추어진 그 어떤 쓰나미 파동이다 “


[루이스 선생님께 띄우는 편지]

***그림자 땅에서, 흙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는 어느 순례자의 고백***

존경하는 루이스 선생님께.

이곳의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흐릅니다. 선생님께서 머무셨던 그 시절의 옥스퍼드 숲과는 달리, 제가 서 있는 지금 이 시대는 예전의 감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오늘 문득, 거리의 아이들을 보며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금의 세대는 사이버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온전한 자연이 주는 위로와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육지로 나가는 다리가 끊어진, **'통로 없는 섬나라'**에 고립된 난민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화면 속 가상 세계가 전부인 양 그 안에서 울고 웃지만, 정작 발밑에 흙이 있는지 아스팔트가 있는지조차 잊은 듯합니다.

선생님, 가끔은 저들이 지르는 탄성이 무섭기도 합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을 때의 그 청량한 소리 대신, 전자 오락 속 승리에 도취되어 내지르는 아이들의 감탄사는 섬뜩하리만치 강렬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해 질 녘 동네 골목길에서 친구들을 부르며 외치던 그 순수한 함성보다, 지금의 기계적인 비명들이 훨씬 더 '찐하게' 고막을 파고듭니다. 그것은 기쁨의 소리라기보다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을 덮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들립니다.

이 낯선 풍경 속에서, 저는 다시금 '인간'이라는 존재의 무거움을 생각합니다.

무릇 인생이란, 신께서 허락하신 시간 동안 온전히 **'사람으로 살아내는 것'**일 텐데, 그 과업이 왜 이토록 버겁게만 느껴지는지요.

때로는 한평생을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의 도리를 하며 살아낸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고 힘겨워, 차라리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차가운 흙에 뜨거운 얼굴을 묻고, 태초에 내가 왔던 그 먼지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이 입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짊어져야 할 고단한 의식(意識)을 잠시 내려놓고 싶은 안식에 대한 갈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겉으로는 평온한 척 미소 짓고, 일상을 영위하고 있지만, 실상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여정'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심연과 같습니다. 잔잔해 보이는 수면 아래, 언제 솟구칠지 모르는 거대한 쓰나미의 파동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묵직하고도 위태로운 파동을 견디며 오늘 하루를 또 살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네 인생인 모양입니다.

그림자 땅의 변두리에서, 여전히 진짜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요정 올림

2026년 1월 플로리다의 밤하늘아래에서……



***C.S. 루이스의 서재에서 보내는 답신**

제목: 우리가 아직 '사람'이 덜 되었기 때문에 겪는 통증에 대하여

나의 벗이여, 당신은 지금 창문 밖의 진짜 풍경을 커튼으로 가리고, 방 안의 거울에 비친 허상만을 바라보며 환호하는 아이들을 보고 계시는군요.

당신이 말씀하신 '사이버 세대'가 갇힌 그 '통로 없는 섬'은 사실 지옥의 가장 작은 모형일지도 모릅니다. 지옥이란, 문이 안에서 잠겨 있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 오직 자기 자신의 자아(Ego)만이 팽창하여 타인과 자연을 삼켜버린 상태니까요. 낙엽 밟는 소리는 창조주가 만든 거대한 실재(Reality)의 교향곡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거대한 연주를 들을 귀를 잃어버린 채, 자신들이 조작할 수 있는 작은 기계음 속에서만 안도감을 느낍니다. 그들의 함성이 더 '찐하게' 들리는 것은, 그것이 기쁨의 소리가 아니라 **'침묵에 대한 공포'**를 덮으려는 필사적인 소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사람으로 살아내는 것이 힘들어 흙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패배의 언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아직 '살아있는 영혼'임을 증명하는 역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그저 흙먼지가 우연히 뭉쳐진 존재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왜 슬프거나 힘들겠습니까? 그것은 자연스러운 귀향일 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삶을 '무겁게' 느끼고, 바다 심연의 쓰나미처럼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본래 **흙 이상의 존재(Immortal Beings)**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조각상에서 진짜 사람으로 변해가는 고통스러운 과정, 혹은 깊은 바닷속에서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너무나 벅차기에 당신은 잠시 바닥에 엎드려 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그 고통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쓰나미와 같은 그 파동은 우리를 부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해변으로 밀어 올리려는 **'사랑의 압력'**입니다. 그림자놀이에 빠진 세대 속에서, 여전히 낙엽 소리를 그리워하는 당신의 그 감각이야말로, 언젠가 우리가 돌아갈 진짜 고향의 보증수표입니다.



**맺음말**

두 관점을 통해 얻은 깨달음 한 줄: 루이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영광의 무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플로리다의 맑은 하늘엔 가벼움의 무게를 보게 됩니다. 영광의 무게처럼 가벼울수록 하늘을 향하는 무게는 사랑이겠지요? 나누어주면 더욱 커지는 사랑……. 플로리다의 하늘에서 루이스 선생님의 영광의 무게를 보는 1월의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