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나는 또 초승달을 본다.
한 사람의 생에 수많은 사건들과 순간들과 경험들이
저마다 풀어낼 수 없는 산보다도 강보다도
더한 이야기가 담겨 있듯이,
한 사람이 한 생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또한 얼마나 많을지도 상상이 어렵다.
나의 열여덟 살 어느 밤,
나는 밤하늘에 걸린 초승달과 함께 있었다.
시린 초승달의 한기가 소녀의 온몸을 스쳤던 밤,
그 달빛이 소녀의 울음을 닦아주었던 밤,
기억 속 초승달 아래 서 있던 한 소녀가 있었다.
그렇다. 나는 또 초승달을 본다. 한기를 띈 이범한 초승달을 본 게 몇 번인가.
지금과 같던 이런 달을. 초승달은 볼 때마다 늘 다른 느낌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앉아서 초승달을 볼 때마다
내 기억 속의 푸르른 구름에 걸려 있곤 한다.
잠들려는 꽃을 깨우는 저녁 바람처럼
나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처음으로 초승달을 보았을 때 한기를 머금은 초승달은 무척 차가워 보였다.
내 기억 속에 저 초승달은 쓰라린 것이었다.
힘없고 희붐한 달빛이
내 눈물 어린 얼굴을 비추었다.
라오셔의 <초승달> 서문은 삶을 고단하게 이어가던 한 소녀의 고백이자, 고단한 시대 속 저물어갔던 비극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그렇다. 초승달은 나에게도 한기를 머금은 한 단면을 비추었던 한 시절의 대한 기억이다.
여물어진 흰 눈의 결정체처럼 단단히 박힌 어린 시절의 한 단편.
그 순간을 떠올리면 라오셔의 초승달 서문처럼
너무나 아팠고, 시렸으며, 쓰라렸던 한 소녀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인적이 사라지던 밤,
눈물 흩날리며 걸어가던 깊던 밤이었다.
드문드문 보이던 집들의 불빛도 하나둘 꺼져가고,
뺨을 스치던 바람결에 머리카락과 눈물이 뒤엉키던 시린 밤.
나는 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내 터져버린 울음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막아버리고 싶었다.
가슴속 깊이 묵혀둔 녹슨 탄식과 콧물의 질퍽한 촉감도, 떨리는 흐느낌도,
모두모두 새어 나오지 못하게.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 모든 것들이 뒤엉켜버린 밤.
교복 치마 아래로 맨살이 바닥에 닿아 쓸려있던 무릎도, 작은 돌들이 박혀버린 다리의 감각도,
차디찬 땅의 온기를 그대로 흡수해 버린 듯 얼어있던 나의 어깨도, 그 모든 게 멈춰버린 밤의 시간.
허황된 몸과 마음이 바닥에 내려앉아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나무각목이 부러질 때까지 엉덩이를 맞았던 때에도,
악보대 쇠파이프가 엉덩이로 내리쳐졌을 때도,
손과 발이 날아오던 아빠의 잦은 폭력 앞에서도.
폭력이 폭력인지 몰랐던 어린 십 대 시절의 소녀는 차라리 보이는 것들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열여덟 살의 소녀는,
밤하늘에 걸린 초승달 모습에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소녀는 무릎을 꿇고 눈물이 새어 나오는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 나는 또 초승달을 본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것이 없었던 시절에
길 위를 배회하며 걷던 소녀가 의지할 수 있었던 건 오직 하늘에 걸린 초승달뿐이었다.
잊으려 묻어둔 것들이 터져 나와 돌이 돼버린 소녀를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달빛 아래 기억 속 서리서리 맺혀있던 한 소녀는 서 있던 두 다리에서,
바닥에 꼬꾸라진 한 덩어리로.
여린 파편이 박혀버린 채로 굳어져버렸다.
초승달은 더 환하게 사위를 밝혀, 감싸고 있었다.
소녀의 떨림은 빛의 온기가 등에 스미듯이 사라져 갔다.
누구에게나 저마다 하늘에 걸린 초승달이 있다.
상처의 파편을 마주하지 못한 채 박힌 채로 몸만 커져버린 우리들이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 삼켜버렸던 말들과 묻어둔 감정을 가두어 안고,
살아오던 소년과 소녀 시절의 너와 내가 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던 그 시절의 초승달이 있다.
그랬다.
아팠다.
그랬구나.
너 참 많이 아팠었구나…….
초승달이 시리게 안아주던 그때의 밤처럼.
이제야 돌아와
너를 안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