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이던 첫째가 어느 날 점심시간에 학교 공중전화로 전화를 했다.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얼른 받았는데 전화 너머 아이의 목소리는 매우 들뜬 하이톤이었다.
"엄마 나 받아쓰기 100점 맞았어!"
"어, 그래? 잘했어~ 근데 옆에 친구들 없어?"
"아, 누구랑 누구랑 있어~"
"그럼 이따 집에 와서 얘기하자~"
"알았어~"
아이는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을 받아 엄마에게 칭찬받고 싶어 전화를 했다. 빨리 알려주고 싶어 점심 먹으러 가기도 전에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을 것이다. 전화가 연결되는 동안 설레며 기다렸을 테고, 엄마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칭찬받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나의 첫마디는 물론 "잘했어~"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그 짧은 칭찬마저 묻히게 만들었다.
"옆에 친구들 없어?"
받아쓰기 100점 맞은 아이가 자랑스러운 마음보다, 주변에 친구들이 있는데 전화해서 점수 자랑하는 아이가 될까 염려되는 마음이 더 컸다. 그 누구랑 누구도 100점을 맞아 엄마에게 전화하길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공공장소에서 "나 잘났소~"하며 떠들어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자칫 자만해질까도 우려되었다. 칭찬의 힘과 효과에 대한 여러 책과 강의를 들은 바로는, 결과가 아닌 노력한 과정을 칭찬해야 한다고 했다. 딱히 집에서 연습을 하지 않았으니, 결과가 좋다고 칭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부도 안 했는데 어떻게 100점 맞았어? 대단하네~"라는 말 대신 "학교에서 연습할 때 집중해서 했나 보다~"라고 했다. "집에서 연습도 안 했는데, 머리가 좋은가 봐~"라는 말 대신 "학교에서 연습하니까 엄마가 걱정 안 해도 되겠다."라고 했다. 나름 노력과 구체성에 초점을 맞춰 고심해서 한 말이었다.
그 이후로 거의 2주에 한 번 받아쓰기 시험을 봤다. 아이는 몇 점을 맞았는지 내가 물어보기 전까지는 먼저 말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물어보면 괜히 시험 점수를 신경 쓰는 엄마가 되는 것 같아 몇 번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궁금하면 한 번씩 "오늘 받아쓰기 시험 봤어?" 하고 물었다. "응" 아이는 대답은 했지만 몇 점인지는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어땠어?"라고 질문할 수밖에 없다. 아이는 점수를 묻는 것이라 찰떡같이 알아듣고, "100점" 혹은 "하나 틀려서 90점" 대답을 했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라는 육아서의 교훈대로, 지문이 쉬웠는지 다른 아이들은 몇 점을 맞았는지 같은 것들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잘했네~" 하고 칭찬했다. 하지만 아이가 칭찬으로 받아들였다고 하기에는 반응이 미지근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 보다 무분별한 칭찬은 독이 된다는 말에 더 귀가 솔깃해진다. 내 아이가 자만하지 않게,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게 경계했다. 겸손한 아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를 향한 칭찬의 말은 자꾸 검열당하고 다듬어지고 줄어든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샘 리처드 교수가 강의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미국인 학생과 한국인 유학생을 인터뷰하며 서양권과 동양권의 문화를 비교해 설명했다. 한국인 유학생은 본인이 똑똑하냐고 물었을 때, "I don't think so. I hope so."라고 자신 없는 투로 답했다. 성적이 어떻게 되느냐를 물었을 때도 우물쭈물하며 대중에게 말하는 것을 꺼려했는데, 알고 보니 2년 만에 펜실베니아대를 졸업할 만큼의 높은 학점이었다. 그러면서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주변에 자랑을 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다고 했다. 자랑스러워는 하지만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고 했다.
반면 미국 학생은 자신이 2년 만에 졸업을 한다면, 엄마는 페이스북에 그 사실을 당장 올릴 것이라고 얘기했다. 거기다 교수가 말을 덧붙였다. "페이스북에 매일 올릴 것이다. 어제 한 말을 당신들은 잊었을 것이고 그러니 다시 상기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부모님은 어떤 사소한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했다.
샘 리처드 교수는 동아시아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잘하지 못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자기비판적인 것이 자기 계발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어쩌면 나도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왔고, 그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 방식을 내 아이들에게 마찬가지로 요구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내가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더 나이 든 엄마에게 바라는 것이 “그때 나 좀 더 칭찬해 주지.”, “나 좀 더 예뻐해 주지.”라는 것들이다. 나는 부족하지 않을 만큼 자신감이 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는 여전히 누군가의 인정을 갈구하는 작은 아이로 돌아간다.
중요한 건 내가 어린 시절 부족했다고 느꼈던 것을 내 아이에게 해줘야겠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따지느라 아이가 칭찬받아 마땅한 것들을 축소시키고 싶지 않다. 앞으로 더 험난한 변화들과 맞닥뜨릴 내 아이들에게 필요한 힘은 부모의 무한한 인정과 사랑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
아이를 향한 잣대를 조금 더 낮추고, 나의 기준을 돌아본다. 아이의 있는 그대로를 조금 더 따뜻하게 바라본다. 이따금씩 리마인드하고 연습한다. 그렇게 한껏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자신감 있게 세상에 나가는 아이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