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은 구부정한 허리에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긴다. 주방까지 걸어가는 동안 널브러진 빨래더미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개어 놓는다. 싱크대 앞에 서서 빨간색 고무장갑을 낀 후, 엉덩이는 뒤로 쭉 빼고 팔꿈치를 개수대에 받치고 설거지를 한다. 20분도 더 넘게 걸려 다 하고 나서는 고무장갑을 벗어 연두색 빨래집게로 집어 놓는다. 돌아서자마자 세탁기로 가 손주들의 티셔츠와 딸의 잠옷, 심지어 사위의 속옷까지 꺼낸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딸의 뒤치다꺼리를 여전히 하고 있다. 내 아이의 할머니, 바로 나의 엄마다.
한 달 전, 엄마는 불쑥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지내시는 아파트가 엘리베이터 교체를 하면서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지자, 몇 주간 피신을 오신 것이다. 낯선 상황은 아니지만 불편한 기간이 되었다. 4년 전 아이들 케어 문제로 합가하여 부대끼며 살았었다. 회사를 다닐 때는 집에 엄마가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는데, 퇴사를 하니 한 집에 엄마가 둘이 있어 겪는 어려움이 있었다. 아이들 교육에 대한 참견, 살림에 대한 간섭. 엄마 주도권에 대한 보이지 않는 다툼이 점점 커져갔다. 합가한 지 만 3년이 되었을 때다.
결국 아이들 교육환경을 위해 이사하면서 분가를 했다. 마냥 좋게 나온 것은 아니어서 데면데면한 상태로 일년이 지났다. 그런데 다시 같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무사히 한 달을 보낼 수 있을까. 나는 엄마를 손님처럼 대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더 무례해지고, 발끈하고, 상처 입힌다는 것을 알기에 선을 지키려고 경계했다.
엄마를 손님처럼 대한다고 해 놓고, 빨래와 설거지를 대신해 주는 엄마를 모른 체했다. 이기적이게도 엄마에게 의지하고 싶은 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때였다. “밥을 먹는 데 어떻게 한 시간이 걸리냐.”, “다 놀았으면 장난감은 수납장에 넣어야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이미 내가 했을만한 지적을 할머니가 또 하는 것이다. 손주들에게 엄마 노릇을 하는 할머니를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거실에 나뒹구는 장난감을 정리하던 엄마를 식탁의자로 데리고 와 앉혔다.
“엄마, 잠깐 얘기 좀 해.”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잔소리하는 것은 내가 할게. 엄마는 그냥 잘한다고 궁둥이 팡팡 쳐 주고, ‘예쁜 것들~’ 하면서 얼굴 쓰다듬어줘."
나는 어쩔 수 없이 잔소리하고 화를 내도 엄마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커서 회상할 때, ‘우리 할머니는 참 따뜻하고 다정하고 칭찬 많이 해 주셨던 분’으로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바라는 할머니 노릇이라고 했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 자식들이니까 참견하지 말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졌을까 신경이 쓰였다. 사실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덧붙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하는 말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어쩌면 내가, 나의 내면 아이가 엄마로부터 받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 엄마의 고단한 나날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더 나를 칭찬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작지 않다. 엄마가 된 나는 많은 육아서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눈빛으로 사랑한다고 애기하고 칭찬해 주겠노라 다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 엄마와 닮아있는 날카로운 말투가 던져질 때마다 당황스럽다.
나는 여전히 엄마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다. 나의 내면아이를 치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리만족을 선택한 것이다. 차마 훌쩍 커버린 딸의 궁둥이를 팡팡 쳐달라고는 말하지 못 해서, 내 아이들에게 애정을 퍼부어 달라고 말했다.
조금 더 솔직하게 얘기했으면 어땠을까.
‘나는 아직도 엄마가 칭찬해 주는 게 좋은가봐. 나한테 예쁘다, 잘한다 해 줘요.’라고. 사실은 아이들 신경 쓰지 말고, 나한테 마음을 써 달라고 얘기했으면 어땠을까. 조금 멋쩍어도 10살 아이 대하듯 칭찬해 달라고 부탁했으면 어땠을까. 아직 함께 살아갈 날들이 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임에도 여전히 망설여진다. 아이들에게는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용기 있게 표현하라고 가르치면서도 나는 실천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