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처음.
처음으로, 첫 연애, 첫 직장, 이번 생은 처음이라..
'처음'이라는 말에는 부담감과 관대함이 공존한다. 처음이니까, 티 안 내고 잘해야만 할 것 같은데.. 반대로 처음이라서 까지껏 좀 못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내가 이곳 유튜브 회사에서 겪은 '처음'은 대본 리딩과 사전 미팅이다. 이 둘은 본격적인 작가 업무의 시작이었고 입사 직후 처음으로 보여준 (나름의) 활약상이기도 했다.
적어도 내 기준에는 그랬다.
입사한 지 일주일 만에 팀에 큰 변화가 생겼다. 바로 한 팀이 두 개로 쪼개진 것. 하나는 기존 크리에이터들 콘텐츠를 만드는 크리에이터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새로운 기획을 만들어내는 뉴콘텐츠팀(이하 뉴콘팀)이었다.
그나마 경력이 있는 직원들은 모조리 크리에이터팀으로 배정되었고, 초짜 신입들은 뉴콘팀으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나는 초짜 신입 작가였다.
뉴콘팀은 '조금이라도 방송물이 들지 않은 신입들끼리 뭔가 대박을 터뜨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대표님의 기대감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때 기획한 아이템이 '아이콘두잇'과 '이결혼의미친X'(이하 이결미)다. (둘 다 그다지 기대에 부응하진 못했다.)
1.
아이캔두잇+이모티콘의 합성어인 '아이콘두잇'은 부업을 꿈꾸는 쇼호스트들이 센스 하나만으로 이모티콘 제작에 뛰어드는 도전기였다. 그리고 이 팀에는 나의 원 오브 오피스 베스트 프렌드, 이안도 함께였다.
첫 번째 촬영은 사전 미팅이었는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방송 경험이 전무한 우리 중에서는 딱히 연출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아이디어 제공자인 내가 사전 미팅 진행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이안이 나의 진행 역량에 대한 우려를 은근하게 내비치는 것이 아닌가. 대놓고 드러내는 것보다 은근하게 드러내는 게 더 기분 나쁠 수 있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걱정된다는 말을 꺼낼까 말까 우물쭈물 망설이는 모습에서 나의 진행 능력이 엄청 의심되지만 차마 대놓고 얘기할 수 없다는 이안의 곤란함이 투명하게 다 읽혀서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눈에 총명함을 힘껏 빼고 이안의 우려를 더 키워버렸다.
"아니 근데 진짜, 고영님, 진행할 때는 질문지를 너무 기계처럼 읽지는 말고.."
"네넹~알겠어요~~"
(내가 그렇게까지 못할 것 같아? 어디 두고 봐라..)
이를 갈고 촬영에 들어가서인지 처음 해보는 진행임에도 긴장되지 않았고, 회사와 콘텐츠에 대한 소개부터 시작해(얼쑤!) 중간중간 적당한 농담과 자연스러운 사전 질문 투척까지(잘한다!) 무난하게 진행을 끝냈다. 칭찬과 지적에 솔직한 이안은 나에게 전현무 같았다며 이안 선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우려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많이 컸나 보다.)
나 역시 이안의 칭찬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뭐 이런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칭찬을 해?' 같은 느낌으로.
"크으- 고영! 오늘 완전 전현무 같았어."
"잘 안 들려요. 더 크게 말해봐요?"
"고영은 우리 회사의 전현무다!!"
2.
'이결혼의미친X'는 한마디로 이혼 이슈를 주제로 한 어른들의 썰전이었다. 네이트판이 없었으면 절대 못 만들었을 콘텐츠이기도 했다.
이결미는 토크쇼인 만큼 패널이 네 명이나 되는 프로였다. 그래서 첫 촬영 날, 첫 대본 리딩 때 네 배는 더 떨렸던 것 같다. 낯가리는 내가 서로 처음 보는 네 남녀를 두고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니.
그러고 보면 사실 도전이란 게 참 별거 없다. '해야 되니까'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밀어붙이면 망설임도, 긴장감도 맥을 못 추니까.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작간데 내가 대본 리딩을 해야지 어떡해. 내가 안 하면 누가 할 거야.라는 시크한 마음가짐으로 마치 10년 차 예능 작가가 된 것 마냥
네 명의 낯선 이를 앞에 앉혀두고 프로그램 기획의도와 첫 촬영의 구성안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돌아가면서 가벼운 자기소개를 하는 아이스 브레이킹도 잊지 않았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 같이 웃음이 터지는 순간들이 있었고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는 스스로를 구경하며 '뭐야, 나 왜 이렇게 청산유수야?' 감탄하는(히히) 유체이탈도 경험했다.
리딩이 끝나자 꽤 괜찮은 '처음'을 만들었다는 뿌듯함에 아드레날린이 치솟았고 패널들에 대한 애정도 치솟아서 나도 모르게 살짝 나대고 말았다.
"여러분.. 저희 같이 유명해져요!!"
나의 드립에 크게 웃어주신 네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싶다.
그 후로도 첫 전화미팅, 첫 기획안, 첫 오디션 등 많은 '처음'이 이어졌지만, 이번 사건들을 계기로 부담감도 아니고 관대함(을 가장한 안일함)도 아니라, '내가 이것도 못할 줄 알고?'라는 프로페셔널한(?) 마음으로 처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덕분에 후회 없는 '처음'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아득하게 느껴질 때까지.
프로페셔널한 향기를 뿜어내는 이상적인 직장인의 모습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