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문턱에서 주절거려보았다.
2022년. 회사에서 첫 생일을 맞았다.
초기 우리 회사의 생일 전통은 ‘다 알면서 속아주는 서프라이즈 파티’였다.
우선, 누군가의 생일이 되면 하루에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한 타 부서 사람들까지 죄다 사내 카페에 모여 불을 끄고 숨어 있는다. 그게 점심시간 직후라는 건 어째 변함이 없기 때문에, 생일자는 점심식사가 끝나가는 게 조금 부담스럽다.
모르는 척, 카페 문을 밀고 들어가면 일제히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끄고, 파리바게트의 대형 케이크를 수십 조각으로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고, 전체 대화방에 축하 인사가 빗발치는 것. 전형적이지만 웃음은 끊이지 않는, 나름 꽤 즐거운 행사였다.
대여섯 번의 서프라이즈 파티에 참석하다 보니 내 생일은 어떻게 등장할지 기대가 됐다. 준비할 시간을 여유 있게 줘야 하니까 2분 정도 늦게 들어가야겠다. 하지만 어색하게 모르는 척은 안 할 거야. 이미 종이 고깔을 쓰고 들어갈 거거든. 기왕이면 같이 점심 먹는 사람들에게 팔로 왕좌를 만들어서 태워달라고 해야겠다. 다들 부끄러워하기만 했는데 나는 좀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겠어. 솔직히 너무 기대되거든! 조용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속에는 광대가 춤추고 있는 나로서는 어서 빨리 생일을 맞고 싶었다. 이렇게 몇 달 동안이나 야무진 관종 계획을 세워놨는데... 코로나 때문에 단체 축하가 사라졌다.
서프라이즈 파티만 사라진 게 아니라 케이크도 사라졌다.
내가 케이크 얼마나 좋아하는데...
케이크는 사주지...
생일 선물에도 변화가 생겼다.
원래 백화점 상품권을 줬었는데 업무 간소화 차원인지, 쿠팡 배송으로 다운그레이드 되었다. 쿠팡에서 뭘 시키나. 생필품이나 잔뜩 살까 싶었는데 집으로 배송시켜 주는 건 아니래서 집에 바리바리 들고 갈 상황을 고려해서 주문해야 했다.
어째 사고 싶은 것들은 다 1~2천 원씩 금액 기준을 초과하고, 다시 고르자니 맘에 드는 게 없었다. 그래서 경영지원팀 초리님께 타협을 시도했다.
고영: 초리님. 쿠팡에서 백화점 상품권 살 수 있어요?
초리: 없어요.
고영: 그럼 제가 돈 보태서 더 비싼 거 시켜도 돼요?
초리: 팀장님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시네~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네. 여기서도 불변의 진리를 경험하고 얄팍한 궁리를 포기했다.
결국 250ml에 4만 9천 원씩이나 하는 사치스러운 러쉬 샴푸를 골랐다. 작은 줄은 알았지만 막상 받아보니 이렇게나 작은 줄은 몰랐다. 콜라 한 캔이 이 정도 하지 않나?
같이 촬영을 진행하는 한 배우님께서 나의 선한 영향력이 촬영장의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든다며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너무나도 감사한 축하였고 고마운 정성이었지만 이 와중에 선한 영향력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잘 모르겠다는 의문이 문득 들었고 재빨리 떨쳐버렸다. 아무렴 어때. 좋은 말이면 됐지.
벌써 서른이 코앞이다.
사는 게 뭘까.
한 번쯤은 나라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이 죽기 전에 오기는 할는지.
기를 쓰고 사랑하는 게 정말 부질없는 일인지.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실히 세금을 내다가 가는(?)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는지.
젊음을 너무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 새벽이었다.
언젠가 나도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노인 중 한 명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타자를 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화면에 비친 젊음이 증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결혼해서 출산과 육아를 평생 짊어지는 삶도 막막하지만 결혼도, 출산도 없이 살아가는 삶도 막막하다.
글이 식었다.
매주 작문 워크숍이라도 있었을 때는 글을 완벽하게 다 쓰기 전에는 집에 갈 수 없었는데.
읽고 또 읽고, 최소한 10번은 고치고, 폰으로도 다시 읽고, 스스로 완벽함을 느낀 후에야 몸도 편해질 수 있었는데.
이제는 업로드 스케줄도 자주 미루고 배고픔과 피곤함을 먼저 살피게 됐다.
저녁을 못 먹어서 배가 고픈데, 집에 가서 써보지 뭐.(배부르니 졸려서 안 씀)
오늘 바빠서 피곤했는데 집 가서 해보든가 하지, 뭐.(씻고 웹툰 보다가 잠)
스스로 치열해지기란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일전에 안철수가 모 TV 프로그램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어떤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싶으면 그 주제에 대한 강연을 먼저 잡는다고. 강연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때부턴 공부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니까 어떻게라도 열심히 배우게 된다는 것. 그 말의 뜻을 요즘 좀 실감 나게 체감한다. 도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셀프-채찍질이란 말인가?
슬슬 부담스러운 내 나이, 29를 생각하며 스물아홉 번째 다짐을 한다.
어디서 희열을 느끼는지 관찰하자.
즐거운 일에 최선을 다하자.
나만의 리듬을 찾자.
어차피 누구나 다 아마추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