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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이 Apr 10. 2022

꿈을 포기할 용기


어중간한 재능은 재앙이라고 했던가.

나에겐 29년 인생을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갈망했고 좌절했으며 결국엔 포기하게 된 꿈이 있다.


그림.


까마득하게 어릴 적부터 그림을 몹시 좋아했다.

'행위'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던 나이에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꼈고 그것만큼 내 집중력을 고조시키는 게 없었다.

학창 시절을 통틀어 성적이 썩 좋은 편이었지만 가장 욕심났던 것은 국영수 성적이 아니었다.

잘 해내야만 한다는 치열하고도 팽팽한 간절함과 지겹고도 긴 학창생활을 이어갈 동력을 끌어낼 정도로 성취감을 느낀 것은 오로지 미술 수행에서 A+를 받는 일이었다.


가족의 응원은 전혀 받지 못했다.

진학과 무관한 나이 때는 도화지에 코를 박고 열심히 그려댄 그림이 어른들에게는 그저 재롱이었고 애교로서 예쁨을 받았을 뿐, 서서히 성적과 등수가 나에 대한 평가를 대표하는 나이에 들어서자 내가 그림을 열심히 그린다는 사실은 외면받았다.


다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어긋난 시선을 마주한 적이 있는가? 그게 나의 유일한 지지대이자 버팀목인 엄마라면? 어린 마음에도 그 어긋난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을 때 닥쳐올 심리적인 함몰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본능적인 자기 방어 차원에서 나 역시 엄마의 어긋난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하며 공부 외에 다른 꿈을 꾸지 않는 척했다.


13살 무렵, 공은 들였으나 기본기가 없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커다란 이요르(곰돌이 푸 친구 중 하나, 푸른 망아지 캐릭터) 그림을 기억한다.

시간 동안 방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내가 완성한 그림을 짜잔! 하고 공개했을 때, 그 순간의

"고영아!"

엄마의 외마디 비명 같은 외침을 기억한다.

"뻘짓 좀 하지 마!"

오빠의 조롱기 섞인 외침도 기억한다.

내가 재앙을 그렸던가? 나는 그저 귀여운 이요르 인형을 종이 위에 재현했을 뿐인데.


엄마는 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엄마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오빠는 배려 없는 언행이 익숙한 한창 사춘기 소년임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 솔직한 상대 임도 알고 있었다. 저 말에 박힌 가시보다도 저 말이 담고 있는 순도 100%의 진실성이 내 마음을 사무치게 무안하게 했다.



그렇다고 그 직후 그림을 포기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꿈이 어디 쉽게 좌절되는 것이었던가.

정말 끊임없이, 열심히 꿈꿨다.

대학교, 아르바이트, 친구의 친구, 여기저기서 마주친 미대 전공 친구들이 자진해서 가르칠 정도로 그림에 대한 나의 열망은 객관적으로 대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감사한 재능기부를 통해 포토샵 다루는 법, 일러스트 다루는 법, 동양화 조금, 소묘 조금, 이렇게 잔돈 모으듯 얕은 지식을 쌓았다.


첫 번째 도전은 내 그림이 담긴 굿즈였다.

'종합손물세트'라는 핸드메이드 마켓의 셀러를 모집하는 교내 현수막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이것은 운명! 갈고닦은 실력을 펼칠 기회가 왔다.

그대로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무지 에코백 100장을 주문했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한여름, 4평 남짓의 원룸 방바닥에 앉아 에코백 위에 100장의 도안을 그렸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열정이 났는지 지금도 미스테리다. 절반도 팔지 못해 판매실적은 형편없었지만(지금은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도 미스테리다.) 기계처럼 가방에 그림을 그리면서 몸이 지칠수록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또렷하게 느꼈다.

그리고 종합손물세트의 깜찍한 판매 수익으로 작은 태블릿을 샀다.


두 번째 도전은 이모티콘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웹툰을 사랑했기에 마린블루스의 성게군이 마조 앤 새디의 마조가 될 때까지 정철연 작가님을 존경했다. 카카오톡 초창기 시절 정철연 작가님이 마조 앤 새디로 기본 이모티콘을 내는 걸 보면서 이모티콘 작가로서의 명예를 꿈꿨다.

에코백을 팔아 번 돈으로 가장 저렴한 태블릿을 샀지만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았다.

평일에는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포토샵을 실행하면 신음을 내며 죽는시늉을 하는) 구형 노트북과 태블릿을 짊어지고 독서실과 카페를 전전하며 이모티콘을 그렸다. 지치지 않고 무려 다섯 번이나 32가지의 이모티콘을 제출했다. 결과는 다섯 번의 반려였다.

점차 그림판스러운, 대충 그린듯한 이모티콘들이 mz세대들에게 각광을 받으면서 '저게 통과되는데 내게 안 되겠어?'라는 생각으로 다섯 번이나 의지에 불을 지폈지만 내 건 끝끝내 안됐다.

이때부터 낭만적인 꿈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은 확실히 다르군.


세 번째이자 마지막 도전은 핫트랙스에서 주최한 스티커 공모전이었다.

이모티콘과 도전 과정은 비슷했지만 내 그림 스타일은 몽글몽글한 다꾸용 그림체가 유행했던 당시 트렌드와 맞지 않아 처참하게 탈락했다.


그 후로 직업이든 부업이든 그림을 업으로 삼는 것은 미련 없이 포기했다. 내가 똑똑했기 때문은 아니고, 아쉬움이 남지 않을 정도로 무식하게 도전해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몇 년간 포기한 꿈에 대해서는 잊고 지냈다. 그리고 최근에 대학 동창 예니를 만났고 눈이 확 뜨이고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니의 후배가 종합손물세트에서 내 에코백을 구매했는데, 그 가방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최근까지도(무려 6년간!) 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심지어 세탁할수록 그림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이 아쉬워 매직으로 직접 덧 그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제껏 그림에 대한 내 꿈은 철이 들면서 사그라든 어린 날의 패기 같은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내 열정이 그만큼 타올랐기 때문에 최대 근력을 발휘했고, 내가 그만큼 용감했기 때문에 꿈을 포기하기로 선택했으며, 그래서 후회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예니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니 비로소 잊혔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마켓에서 가방을 구매해간 동기, 응원하러 학교까지 찾아왔던 오빠, 지인분들께 나눠준다며 에코백을 스무 장 넘게 주문하신 친구의 이모님, 이모티콘 도안을 다듬어준 디자이너 친구와 캐릭터 소개글에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준 회사 동료...

내 꿈은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흠집 없이 사그라들 수 있었던 거구나.


지난 10년 간 나의 이상적인 꿈은 그림이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있던 모든 사람들의 지지와 용기를 받아 용감하게, 그 꿈을 포기했다.

이제는 글이라는 이성적인 꿈이 생겼다.

앞으로도 또 다른, 많은 이들로부터 용기를 받을 테고(이미 시작되었다고 느낀다) 이게 나의 본업이 맞는지, 아니면 이 역시 이상적인 꿈이었는지 당분간은 알 수 없을 테지만.

일단 다음 10년도 아주 용감하게, 글을 써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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