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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이 Apr 01. 2022

마이 오피스 베스트 프렌드, 메리와 이안


[오전 9:50] 「여보씨~ 카페 내려가실?」   

  

매일 아침, 출근 시간 10분 전을 알리는 규칙적인 알람이 울린다.

여기서 유추해볼 수 있는 두 가지 사실.

첫째, 회사에 나를 ‘여보씨’라고 부르는 동료가 있다.

둘째, 회사에 사내 복지용 카페가 있다.     



‘내가 스타트업에 다니고 있구나‘를 온 피부로 느끼게 하는 회사의 특징은 바로 이 두 가지이다.

매우 젊은, 혹은 어린 동료들과 오로지 직원만을 위해 운영되는 카페.

(50명 남짓의 매우 작은 회사임에도 할 건 다 한다.)

이곳은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지향하는 젊은 회사답게 직급과 나이를 불문하고 평등하게 ‘~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나 미세한 균열은 생기기 마련이듯, 예외가 허용되는 저마다의 은밀한 소그룹이 있으며 나에게도 은근한 반존대가 허용되는 유일한 두 사람이 있다.     



이번에는 앞으로 자주 등장하게 될 그 두 명의 동료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회사 동료와 절친, 그 사이 어딘가에서 공과 사를 넘나드는 마이 오피스 베스트프렌드,  메리와 이안.     



메리는 말수가 많지는 않지만 눈빛은 누구보다 그윽하며, 조용한 것치고 술과 사람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나보다 어리지만 결혼에 있어서는 인생 선배인 그녀는 어느 촬영 후

PD들의 뒷풀이 자리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유부녀라고 부르는 게 싫다는 고민을 토로했다.

하긴, 한창 어린 나이에 유부녀라는 프레임에 갇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썩 지겨웠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유부녀’는 어감이 너무 별로다.

그래서 나는, 그날 이후로 그녀를 ‘메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 생활을 시작해서인지 메리는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입사 후 첫 회식 자리에서 만취한 상태로 “집에 가기 시러!!”를 외친 이후로

메리는 사내 거의 모든 저녁 약속에 초대되며 심심하지 않은 직장생활을 즐기고 있다.     


 

메리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항상 반쯤 풀린 눈이 디폴트인 얼굴로 전쟁이 나도 느릿느릿

걸어 다닐 것 같은 사람. 가끔은 지켜보는 것이 너무도 답답한 나머지 메리를 그대로 누끼 따서 2배속으로 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때도 있다. 먹는 속도도 매한가지라 점심시간마다 항상 양껏 먹지 못하고 적당한 타이밍에 숟가락을 내려놓는 것이 늘 눈에 밟혔다. 그 점이 마음 쓰였던 나머지 둘이서만 밥을 먹게 되었을 때 메리가 충분히 먹도록 기다려 준 적이 있다.

그리고 그날, 입사 이래 처음으로 지각을 했다.



촬영장에서조차 잃지 않는 특유의 여유로움 때문에 지금 놀러 왔냐고 팀장에게 쌍욕을 먹은 후일담은 나중에 야외촬영 썰에서 풀도록 하겠다.     



하여튼, 지금 남편과의 연애 시절, ‘여보씨’는 메리와 남편이 서로를 부르던 애정 어린 호칭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고영님, 정말 남자친구한테 한 번도 여보씨라고 불러본 적 없어요?"


“네, 전 듣도 보도 못한 단어인데요. 그게 당연한 건가요?”


“그럼 제가 여보씨라고 불러줄게요!”     



그 후 종종 서로 기분이 좋을 때마다(사실 그거보단 좀 더 자주) ‘여보씨’라고 부르곤 하는데 마치 애교 많은 여고생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괜찮다. 우리가 이토록 친해진 이유도 애교가 많은 메리의 성향과 그걸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던 나의 성향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안은 해외유학파 PD이다.

이안은 메리 같은 애칭은 아니고 그의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차용하는 그의 유학 시절 영어 이름이다.

모든 직원들이 영문 번역이 필요할 때마다 쪼르르 찾아간다는 인간 파파고 이안.

그의 첫인상은 언제나 무채색 츄리닝을 입고 구석에서 편집만 하는, 낯빛조차 어두운 안개 같은 사람이었다. 마치 그는 초등학교 시절, 반에서 제일 목소리 작고 말수 없는 세상 내성적인 캐릭터를 담당했을 것만 같았다.

그와 처음으로 말을 튼 것은 자막 검수를 할 때였다. 회사 계정에 올라가는 모든 유튜브 영상은 자막 검수 과정을 거친다. 말 그대로 검수 담당자가 영상의 모든 자막을 맞춤법 검사기에 돌려 이상이 없는지 체크하는 것이다. 그때 이안은 정신 건강 관련 영상을 편집했고, 나는 그 영상의 검수 담당자로 배정되었다. 의심이 많은 나는 ‘건망증’의 ‘건망’을 한자로 표기해놓은 부분에서 그 한자가 정말 건망증에 해당하는 한자가 맞는지 역으로 한문 사전을 뒤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안은 나도 모르는 새 다가와 검수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고 곧이어,     


“아니, 그런 것까지 검수를 한다고? 나를 얼마나 못 믿는 거야!”     


라고 뒤통수에서 울려 퍼지는 외침에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저 사람, 자기 생각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검수 결과, ‘건망’에 해당하는 한자는 잘못 표기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게 말문이 터진 이후 많은 대화와 친목의 시간을 거쳐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은 180도 바뀌었다. 그는 조용하다기보다 인내하는 사람이었고 내성적이기보다 신중한 사람이었으며 생각보다 유쾌한 사람이었다.(요즘은 입고 다니는 옷 색깔도 점점 밝아지고 있다.)

지금은 촌철살인의 예리함과 마치 오빠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깊은 속내, 동성 친구 저리 가라 하는 공감 능력이라는 매력 포인트들을 추가로 발굴해낸 상태이다.

메리에게는 비밀이지만 이안은 가장 신뢰하는 동료이자 유일하게 사적인 고민을 가감없이 털어놓는 동료이기도 하다. (특히 짝사랑에 대한 고민을 아주 잘 들어준다.)     



이제 메리와 이안과 나는 회사에서 같이 점심만 먹는 게 아니라 주말에 따로 만나 피크닉도 가고 쇼핑도 가는 팸이 되었다. 이 둘은 회사 생활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활력소이자 취업의 신이 덤으로 주신 선물인가 싶은 뜻밖의 인연들이다. 기억에 오래 남기고 싶은 동료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이들과 진행했던 프로젝트들과 웃음이 터지고 위로가 되었던 모든 순간들에 대해 차차 이야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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