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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이 Mar 28. 2022

매일 다른 옷을 입기 위해 회사에 다닙니다.


나에게 있어 인생의 낙의 절반은 옷에 있었으니, '자유로운 복장'은 직장 선택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계속 작은 회사들을 찾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꼭 세미 정장을 입지 않아도 괜찮은 곳. 찢어진 청바지를 입어도 눈길 한번 끌지 않는 곳. 대학생 때부터 모아 온 컬렉션들을 계속 입을 수 있는 곳. 내 잠재능력과 역량의 수준을 떠나서 대기업이나 공기업은 못 다녔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니, 다녔다면 인생의 가장 커다란 즐거움을 잃었을 거다.


나에게 있어 옷은 내가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넘어서 가난을 감추는 수단, 삶의 즐거움, 취미생활, 29년 인생 최대 관심사 그리고 적금보다 많은 투자를 한 종목이다.

그저 배만 채우면 만족하는 식성이라 먹는 것에는 사치를 부릴 줄 몰라, 술 담배의 즐거움도 몰라, 매일 아침 커피를 즐길 줄도 몰라, 그렇게 수도꼭지 잠그듯 야무지게 긁어모은 돈은 모조리 옷값으로 샜다.

본디 안목이 힙하게 타고나지를 못해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뼈저린 후회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를 꾸며내고 싶은 욕심과 감추고 싶은 욕망은 내 인생의 원동력이 될 정도로 대단했다. 정말 다양하고 많은 옷을 샀고 매일 다른 옷을 입었다. 이틀 연속 같은 옷을 입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두 달 연속 매일 다른 룩을 입는 게 가능했다. 그 결과, 지금은 적어도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 정도는 골라낼 줄 아는 것 같다.


내일 새로운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은 매일 하루를 즐겁게 시작할 수 있는 동기였고,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출근 준비를 할 수 있는 하루의 에너지였다. 특히 부피가 크고 가격도 비싼 겨울옷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저렴한 여름옷이 훨씬 많아서 모든 직장에서 여름철만 되면 내가 단 하루도 같은 옷을 입은 적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이 최소 한 명씩은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튜브 회사를 비롯해 모든 스타트업의 메리트 중 하나는 옷을 아무렇게나 입어도 된다는 것이 아닐까? 스타트업이 내세울 건 젊음인데 복장이야말로 보이는 자체로 젊음이고 자유로움이니까! 대표님부터 와이드 팬츠를 입고 다니는데 말 다했지, 뭐. 하지만 정작 우리 직원들은 대부분 추리닝이나 후드, 플리스 재킷을 주로 입는다. 한마디로 ‘표현의 자유’보다는 ‘육신의 편안함’에 치중된 분위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꽤 후리하다.

이 후리함 속에서 이제까지 입은 옷들은 엄청 다양하다. 만세 하면 허리가 다 드러나는 크롭 기장의 니트, 빠르게 걸으면 펄럭펄럭 소리가 날 정도로 통이 넓은 청바지, 허벅지까지 트임이 있는 롱스커트라던지(그런 옷은 도대체 어디서 사는 거냐는 질문을 들었다.), 곰돌이가 생각나는 퐁실퐁실한 퍼 재킷, 빛 반사가 심한 화려한 코르덴 바지 등등. 프린세스 메이커 2022 실사판을 한다는 생각으로 매일 옷을 골라 입고 즐겁게 출근했다.

내 이상향은 일도 잘하고, 열심히 회사를 다니면서 꾸미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는 멋있는 직장인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나 열심히 꾸몄어요’를 절대 티 내지 않는 것이다. 뭐든지 티가 나면 멋이 없다. 나만의 개성 있는 스타일을 찾는 것도, 유능하고 멋진 작가가 되는 것도 아직은 미래 시점의 일이지만 적절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자신한다.

입사하고 2달쯤 지났을 때, 우리 제작팀의 관리자분이 나를 유심히 보며 ‘고영님은 이제까지 한 번도 같은 옷을 입은 적이 없어.’라고 했다. 역시 올 것이 왔군,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심혈을 기울인 노력과 열정을 짐짓 모른 체했다.


“어머, 제가 그랬나요?”


역시, 계획대로 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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