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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이 Jan 12. 2023

유튜브 작가의 비굴한 연봉협상기

조금만 더 주세요


연봉, 회사규모, 복지 기타 등등 조건 다 버리고 재밌는 일만 찾아다녔다.

보통의 회사원이라면 대개 감내해야 할 스트레스, 내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나한테 떨어지는 업무, 좀처럼 오지 않는 퇴근시간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비현실적으로 '즐거운 회사생활'만 쏙쏙 골라먹고 다닌 것이다.  

비현실적이고 즐거운 회사생활의 치명적인 단점은 연봉협상 때 내세울 게 없다는 거다.


유튜브 스타트업에 작가로 근무한 지 3개월이 조금 지난날이었다. 뜬금없이 대표님의 호출을 받았다.

아무리 소규모 스타트업이라지만 신입사원이 대표와 독대할 일은 드물다.


'혹시 나 뭐 잘못한 거 있나...?'


두근대는 심장으로 텅 빈 회의실을 찾아갔는데 대표님과 독대한 자리는 의외로 '연봉협상'이었다. 내용과 결과는 통보에 가까웠지만. 그래서 불만이었다는 건 아니고... 그 자리에서 내가 내세울 게 없었다는 거다.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 면접날이었다. 나와 면접을 본 팀장은 나머지 면접관을 모두 내보내고 원하는 연봉을 물었다. 나는 xx원을 불렀고 (그마저 3천에 못 미치는 적은 금액이었다.) 팀장은 잠시 고민했다. 사실 불렀다기 보단 최소한의 금액을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역시나 고민을 하더라.


"음... 학벌도 있고 다른 근무 경력이 있어서 그 정도는 받고 싶겠죠. 근데 저희가 신입한테 적용되는 금액이 정해져 있어서... 일단 그대로 따르고 3개월 후에 원했던 대로 올려드릴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흡족하게 출근을 약속했다. 다른 신입들이 받는 금액보다는 조금 더 올려 받기도 했고(10만 원) 유튜브 작가라는 직무는 생전 처음이었던지라 적은 금액이었어도 받아들일 마음도 있었고. 그렇게 3개월만 버티면 아주 나쁘진 않은 연봉을 받게 될 줄 알았다. 그 정도로 난 소박한 사람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팀장과 대표는 보기보다 사이가 많이 안 좋았고, 면접에서 팀장의 호언장담은 추후 전혀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안이었으며, 내가 처음 원했던 xx원을 받고 싶으면 다시 대표님과의 연봉협상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농담도 주고받고 대화도 많이 하고 밥도 같이 먹어본 팀장님이 아니라 대표님이라니.

그것도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습기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바쁘게 콘텐츠를 기획하고 구성안을 쓰고 출연자를 섭외하던 지난날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지만 그 영상 한가운데 아주 큰 자막이 떠다녔다.


- 그래서 뭐?


성과를 논하려면 지표가 있어야 하고 회사의 이익이 눈에 보여야 하는데 신입 초짜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영상은 조회수가 몇 천 뿐이었고 그 어떤 광고수익이라던지 회사의 네임밸류에 도움이 전혀 안 됐다.


"지금 한 달에 얼마 받고 있어요?"


불쑥 급여에 대한 대표님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들어왔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모르겠지만 정확한 금액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세 번이나 통장에 찍힌 금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도 아니고 내 월급인데.  

질문이 던져진 순간부터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는 것 같았고 '나 얼마 받더라? 몇 만 원 정도는 차이 나도 괜찮나? 세전이야 세후야?' 어버버 하던 나는 면접 때 신입 기준 연봉이라고 들었던 XX만원을 12로 나눈 금액을 말했다. 대표님은 내 대답을 듣긴 한 건지,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 정답을 쥐어 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단박에 월 15만 원을 올려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도 하고 예의 바르게 문도 살짝 닫고 나왔다. 그래서 그 연봉은 내가 면접 때 약속받았던 금액에 충족하는지 아니면 미달인지 (미달이다.) 연봉 인상률로 치면 몇 프로라고 볼 수 있는지, 실질적인 계산은 뒤로 한 채.

서로 물러서지 않는 창과 방패의 팽팽한 대결구도 따위는 없었다.

자리에 돌아와 모니터에 비친 내 얼굴과 마주친 순간, 그제야 떠오르고 말았다.

나 신입 월급보다 10만 원 더 받고 있었는데...


올려주겠다는 금액에서 내가 더 받고 있던 금액을 제하니 꼴랑 5만 원이 남았다. 힘차게 감사하다고 외치며 고개 숙인 값이 달에 5만 원인 셈이다. 안 그래도 내 모습이 좀 비굴하다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그게 교통비도 안 되는 돈을 위한 것이었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자리를 박차고 '잠시만요!!' 하고 회의실로 달려 올라갔어야 인지상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할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말할까 말까라기보다는 내가 말할 수 있을까..? 에 가까웠다. 말하지 못하면 퇴사할 때까지 억울해할 거면서.

의존적인 소심인인 나는 가장 친하게 지내던 PD님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저 방금 연봉협상했는데요,, 실수로 지금 받고 있는 금액보다 적게 말해가지고 아주 망하게 생겼는데 어떡하죠..]

[ㅋㅋㅋ. 할 말 있다고 메시지 보내고 가서 말씀드리세요.]

[저 너무 바보 같죠...?]

[ㅋㅋㅋㅋ. 괜찮음.]


메시지를 써 놓고 세 번쯤 고치면서 고민하다가-시간 괜찮으세요? / 다시 뵐 수 있을까요?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겨우 엔터를 쳤고 1분도 안되어 흔쾌히 다시 오라는 답을 받았다.

조심스레 사실 더 받고 있었는데 잘못 말씀드렸다 등등 이러저러한 사정을 말했더니 쿨하게 정정한 금액 기준으로 똑같이 올려주겠다고 했다. 뭐야. 말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별 거 아니잖아? (별 거 아닌 금액이기는 했다.)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돌아서는 찰나, 뒤통수에 대표님의 한 마디가 날아와 꽂혔다.


"많이 받네?"

"저요? 하하하.."


그렇다. 조회수가 안 나오는 채널의 신입 유튜브 작가는 3천에 못 미치는 연봉에도 많이 받는다는 소릴 듣는다. 그럼에도 불쾌한 내색을 할 수 없다. 성과를 증명할 수 있는 건 영상의 조회수뿐이기에.


지금처럼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않고 한 분야를 꾸준히 전문성 있게 팠다는 전제 하에, 내가 상상한 연봉협상은 이제까지 내가 어떻게 기여해 왔는지 열심히 어필하고 원하는 금액을 (조금 높게) 부르면 그 금액을 바탕으로 치열한 흥정을 벌인 끝에 원하던 금액보다 쪼끔 덜 받는 것으로 합의를 보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렇게 왕좌왕하면서 비굴한 것은 아니었다.

유튜브 콘텐츠는 수익이 나기 어렵다 보니 '나 열심히 했어요!'만 가지고서는 성과를 증명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성향이 좀 노예체질이다. 주시는 대로 넙죽넙죽 받는 게 편하고 반발하고 싶지 않고 눈치도 많이 보고 120% 확신이 없으면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는.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연봉협상 과정에서 원하는 만큼 올려주지 않으면 더 일하기는 힘들 것 같다(?) 고도하는 것 같더구먼 내가 그랬다면 진짜 그만두라고 할까 봐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이번 프로그램 기획도 제 아이디어였고요 진행, 섭외, 디자인까지 제가 다 했어요. 프로젝트 참여율이 70%는 됩니다. XX까지는 올려주세요."


보다는


"뽑아주신 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데 조금 더 주시면 안 될까요?"


라고 말하는 게 지금 내 입장에선 자연스럽고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일을 골라 다니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스타트업에서 젊고 통통 튀는 유튜브 콘텐츠 작가라는 직업에 뛰어든 것에 대한 부작용, 약점 내지 위험요소는 충분히 감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감수해야 할 것 목록에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연봉협상에서 쭈그러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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