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처음 사랑했던 때의 이야기다.
떠난 건 그 사람이었고, 텅 빈 것은 나였다.
이별이 다가오는 기척은 이상하리만큼 정확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쎄하다’, ‘묘하다’, ‘불길하다’ 같은 감각. 몇 년을 함께 보냈지만, 너무도 평범한 어느 날의 통화로 우리는 마지막을 맞았다.
어이없다기보다 무례했다. 예의상 마지막으로 얼굴은
보고 인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아팠던 건 이 말이었다.
“넌, 좋아하는 게 없잖아.”
“이제 널 사랑하지 않아” 혹은 “헤어지자”였다면
덜 아팠을지도 모른다.
‘너는 재미없고 매력적이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은 단순히 마음이 식었다는 선언을 넘어,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해야 할까.
그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사실 그 전의 나는 조금 별난 사람이었다.
구제시장을 뒤져 지금은 꿈도 못 꿀 화려한 패턴, 특이한 재질의 옷을 고르고, 자주 지니고 다니는 소지품들은 홍대 소품샵이나 길거리 좌판에 한참 서서 신중하게 골랐다.
머리 색은 몇 년간 검정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다.
남들이 잘 모르는 인디 밴드 음악, 오래된 노래를 즐겨 들었다.
그 무렵, 그런 취향 때문에 ‘힙스터’ 혹은 ‘홍대병’이라 불리긴 했어도, 정말로 내가 좋아한 것들이었다.
난 그런 사람이었고 그때 그 사람을 만났다.
사랑은 균형을 무너뜨렸다.
나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해서,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하는 게 더 행복했고
나는 그렇게 나만의 취향을 잃어갔다.
그래서 그는 떠났고, 나는 그 둘을 잃었다.
헤어짐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건 ‘나’라는 사람의 일부가 없어진 느낌이었다.
내 취향을 다시 찾아야, 다시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다시 나를 찾는 일은 낯설었다.
예전이라면 좋아했을 만한 것도 전처럼 다시 좋아지지
않았고, 즐겁던 일들도 어느새 무채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일부터 다시 했다.
그저 하루를 살고, 자기 전 마음속으로 오늘의 한줄평을 남겼다.
‘다들 맛있다던 그 신메뉴, 너무 느끼하고 달더라. 역시 아메리카노가 최고지.’
‘오늘 꽃집에서 본 그 꽃 이름이.. 미스티블루랬지? 기억해 놔야지. 나는 너무 쨍한 색보다는 그런 색감이 더 눈길이 가더라.’
‘외롭다고 사람들을 자주 만났더니 오히려 공허하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더 필요한 사람 같아.’
하루치 문장을 색종이처럼 이어 붙이자, 흩어진 조각들이 모였다. 그러다 깨달았다.
예전엔 좋아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도 있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인정하고 가지치기하자, 희미했던 윤곽이 다시 또렷해졌다.
남의 옷이 아니라 내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듯 가벼워졌다.
한때 ‘분위기 있는 사람’ 동경을 동경했지만,
내가 가진 느낌은 다른 결이라는 사실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취향이 선명해질수록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너는 뭔가.. 너만의 느낌이 있어.”
그 뭔가가 나도 뭔지는 잘 몰라도, 아마 취향이 만든 나만의 매력이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는 요란하게 빠른 시대를 살고 있다.
알아서 척척 띄워주는 알고리즘에 의한 영상, 마침 딱 필요했던 쇼핑품목 추천.
마치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것처럼.
하지만 남이 정해준 것들만 소비하다 보면 정작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을, 나는 안다.
취향을 갖는다는 건, 수많은 잡음 속에서도
“이게 진짜 내가 원하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 확신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러려면 나 자신을 자주,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내가 이걸 왜 좋아하지? 이건 왜 불편하지?‘
그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하는 과정을 꾸준히
반복해야 한다.
결국, 취향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힘이고,
나만의 매력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남들과 같지 않아도, 꼭 특별해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 “넌 뭘 좋아해?”라고 물을 때,
우물쭈물하지 않고 ‘나? 나는 이런 게 좋더라.’라고
또렷하게 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 아닐까.
그게 곧 나만의 고유함이고,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당신만의 색이다.
그건 분명, 당신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