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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May 31. 2024

알리바이로 가득한 시대와 흘러가는 시간(2)

연남. 라이카시네마. 박하사탕. 명동. 명동예술극장. 알리바이 연대기.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3편으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전 글을 읽고 오시길 바랍니다. 


2. 시간 역행에서 느끼는 알리바이의 수치심

이제 <박하사탕>에서 느낄 수 있는 1980년대의 수치심을 마주하자. <박하사탕>은 야유회-사진기-삶은 아름답다-고백-기도-면회-소풍 순으로 IMF 시기부터 시작해 19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차를 타고 타임리프를 시작하는데 마치 '영호(설경구 분)'의 알리바이를 보는 기분이 든다. 즉, 영호라는 80년대 이전에 태어나 청년으로 80년대를 살아가야 했던 남성이 왜 지금의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알리바이를 보는 기분이다. 이러한 기분은 야유회를 찾은 영호의 행동에서부터 시작된다. 가리봉동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이 만든 봉우회에서 20년만에 연 야유회에 허름한 정장을 입고 등장한 영호는 자신을 알아보는 옛 동료들에게 "날 기억하네..."라며 혼잣말을 한다. 자신을 알아본 동료들을 영호는 반가워하기보다 오히려 그에게 연락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선배에게는 화를 내고 다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즐겨야 난동을 피우며 자신을 알아본 것에 화가 난 듯 혹은 무언가를 숨기고 싶은 듯 혹은 숨고 싶은 듯 행동한다. 그러다 영호는 그 유명한 장면처럼 철로 위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친다. 이때 스크린에는 기차의 기적 소리를 뚫고 절규하는 영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그의 핏발 선 눈, 흐르는 눈물과 콧물, 절규를 내지르느라 벌어진 입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관객은 그가 왜 야유회에서 저런 행동을 하는지 그의 절규는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한다. 그가 돌아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출처. 왓챠피디아

영호의 외침과 함께 시작되는 시간 역행은 영호가 삶을 비관하며 철로에서 기차에 몸을 던지는 행동에 대한 알리바이를 보여주며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과정 같다. 다르게 말하면 관객으로 하여금 영호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게 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정당화 과정은 영호의 외침 자체를 통해서 무의미해진다. 영호가 원하는 것은 지금의 삶을 정당화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삶을 살고 싶다는 의미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영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며 자신의 죄책감을 회피하고 싶어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시간 역행으로 영호의 알리바이를 보며 삶의 정당화를 보면서도 죄책감과 책임 회피를 바라는 영호의 외침 사이에서 은연 중에 관객은 어긋남을 느끼고 역행하는 과정에서 영호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되지만 영호를 향한 측은지심, 그러니까 감정이입은 지속적으로 방해된다. 이러한 어긋남의 첫 단추는 사진기 파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기 파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영호의 죄책감과 그가 돌아가고 싶은 시점이다. IMF로 사업이 망하고 아내와는 이혼해 모든 것을 잃게 된 영호는 자신을 찾아온, 첫사랑 '순임(문소리 분)'의 남편에게 자신의 삶을 망친 것이 누구인지 생각하면서 모조리 다 죽여버리고 싶다고, 돈이 없어 총알을 충분히 사지 못해 자신의 삶을 망친 누군가 한 명을 골라 죽이고 싶다고 말한다. 뒤이어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이 누워있는 순임에게 시장에서 산, 박하사탕이 담긴 병을 손에 쥐어주며 옛날 순임과 만날 당시 순임이 보내주던 박하사탕을 지금까지 모으고 있었다는 거짓말을 한다. 여기서 영호가 느끼는 죄책감은 삶에서 스스로에게 느끼는 죄책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영호는 자신의 삶이 망가진 것에 대해 누구에게 책임을 돌려야 할지 몰라 방향 없이 분노하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분노의 방향을 자신의 선임 형사이자 동업자이기도 했던 '강 사장(이대연)'에게 고정해 총을 쏘려 한 순간 영호는 머뭇거리고 총을 제대로 겨냥하지도 않았으며 끝내 강 사장을 죽이지도 않았다. 그저 황급히 현장에서 도망친다. 영호의 분노는 방향이 없으며 스스로도 자신의 삶이 외부에 의해서 망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영호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영호가 돌아가고 싶은 시점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순수했을 시기, 순임을 만났던 젊은 시절임을 알 수 있다. 방향을 잃은 분노에 이성을 잃은 것 같았던 영호는 정작 자신의 삶에서 가장 순수했을 것이며 이제는 의식이 없어 자신을 보지도 못하는 첫사랑 순임 앞에서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신의 순수성을 보여주려 한다. 그런데 박하사탕 병을 순임에게 쥐어준 뒤 눈물을 훔치며 황급히 중환자실을 나온 영호는 남편에게서 유일하게 영호의 순수성을 기억나게 할, 순임이 사줬던 사진기를 받자 그것을 시장에서 고작 4만원을 받고 팔아버린다. 또한 삶의 어느 순간의 기록이 남아있을 사진기 속 필름은 가로등 빛에 노출시켜 다시는 볼 수 없게 한다. 그에게 순수했던 시기는 돌아가고 싶은 시기이지만 동시에 기억나는 어떤 트리거가 순수성을 포기해야 했던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게 하는 형벌이기도 한 것이다. 즉, 그의 젊은 시절인 80년대는 가장 순수했던 시기이자 수치심으로 가득한 시기로 돌아갈 수 없기에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기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진기 파트는 가장 순수했으나 죄책감으로 가득한 1980년대로 돌아가고 싶으나 돌아가지 못하는 영호의 어긋남을 보여준다.


사진기 파트 이후 시간 역행은 이러한 영호의 어긋남을 더욱 강조한다. 면회와 소풍 파트에서 알 수 있듯 가리봉동 공장 노동자 출신이나 영호는 노동자 동료들과 야유회에서 들꽃을 보며 좋아하고 순임을 손카메라로 담아주며 순임이 보내준 박하사탕을 몰래 모아 관물대에 보관하고 있을 정도로 순수한 청년이다. 하지만 계엄령으로 면회를 온 순임과 만나지 못하고 출동하면서 박하사탕 병이 깨져 본인의 순수함을 함께 짓밟히기도 한 인물이다. 순수함이 짓밟힌 것을 시작으로 영호는 군인으로 다리에 유탄을 맞아 광주 땅에 피를 흘린 피해자이자 겁에 질린 한 소녀를 유탄으로 쏴 죽인 가해자가 된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순수성을 짓밟히고 죄를 짓게 된 영호의 비극성은 어둠으로 누군지 알 수 없는 익명의 군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신의 유탄에 쓰러진 소녀를 끌어안고 비명을 지르는 영호의 모습에서 강조된다. 이러한 영호의 모습은 감정이입을 통해 관객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영호는 가해자이나 피해자이며 명령을 내린 자와 명령을 받아 함께 온 자 모두 익명인 가운데 갑작스럽게 시대의 격랑 속에서 조명을 받은 80년대의 '평범한 소시민'이기 때문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시간 역행으로 관객이 먼저 마주하는 것은 순수성을 잃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망치는 영호의 모습이다. 면회 전 기도에서 주변들의 예상과 다르게 영호는 경찰이 되어 노조 활동을 한 노동자를 고문해 똥물을 뒤집어쓴다. 폭력과는 거리가 먼 영호에게 군 복무 중 뒤집어쓴 소녀의 피는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라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그가 경찰이 된 것은 트라우마를 직시하며 저항하려는 의지보다는 오히려 생존을 위해 트라우마의 내부로 도망쳐 현실에 순응하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영호는 경찰서에서 고문이 행해지는 것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의문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경찰을 그만두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사회적 출신이라 할 수 있는 노동 계급의 어느 노동자를 직접 고문해 똥물을 뒤집어쓰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뒤집어쓴 소녀의 피가 영호에게 트라우마를 안긴 시작이라면 노동자의 똥물은 영호가 완전히 트라우마 내부로 도망쳐 순수성을 포기하는 계기라 할 수 있다. 똥물을 뒤집어쓴 영호는 자신의 손을 보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순임이 보는 앞에서 아무리 씻어도 냄새가 잘 안 빠질 것이라는 선임 강 형사의 말처럼 '홍자(김여진 분)'의 엉덩이를 만지며 성추행, 똥물 냄새가 나는 행동을 한다. 나아가 그는 회식날 선임들에게 대들며 군대식 제식을 강요하고 홍자와는 잠자리를 가지기 전 하늘을 똑바로 바라보며 기도하는 홍자와 달리 옆으로 돌아누워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하늘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영호의 삶에서는 이후, 하지만 영화상에서는 이전인 고백과 삶은 아름답다에서 관객은 순수성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히려 자신의 순수했던 과거를 비웃는 영호의 모습을 보게 된다. 폭력 경찰로 고문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영호는 자신의 일기장에 삶은 아름답다고 적은 대학생에게 삶이 진짜 아름답다고 생각하냐고 물어보며 그의 순수성을 비웃는다. 군산으로 수배자를 잡으러 간 영호는 순임이 군산에 살았다는 기억에 감상에 빠지나 카페 종업원인 '경아(고서희 분)'의 품에서 순임을 목놓아 부르짖으며 함께 하룻밤을 보낸다. 경아와 하룻밤을 보낸 후 영호는 악독한 폭력 경찰답게 수배자를 잡는 것이 아니라 멍하니 체포 장면을 바라보고 경아와 항구에서 보기로 한 약속은 지키지 않고 서울로 돌아간다. 영호에게 있어 경아는 순임을 떠오르게 하는 군산 여자로 순임 앞에서 보인 자신의 행동에 나아가 군인일 때 면회 온 순임을 보고도 나서지 못한 행동, 소녀를 쏴 손에 피를 묻히게 된 자신의 행동 등 그의 죄책감을 울부짖음을 통해 해소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그가 폭력 경찰답지 않게 수배자를 체포하지 않은 것은 잠깐 떠오른 순수성에 취한 것에 불과하다. 즉, 고백 파트는 영호에게 있어 군산의 하룻밤은 순수성과 죄책감 사이에서 호접지몽의 하룻밤이자 동시에 순수성을 완전히 배설해버리는 부분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렇게 순수성을 배설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감에도 영호는 삶을 온전히 즐기며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에게 고문당한 운동권 출신 남성을 우연히 식당에서 마주친 영호는 "삶은 참 아름답다. 그렇죠?"라며 자신 앞에서 겁을 먹은 그를 비웃는다. 이러한 영호의 비웃음은 그에게 더 이상 순수성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순수성을 조금은 남겨두고 있기에 삶이 아름답다고 정말 생각하냐는 물음으로 상대의 순수함을 비웃었다면 정반대로 자신을 보고 겁에 질린 그와 달리 죄를 짓고도 떵떵거리며 사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받아들여 정말 아름답다고 말하며 상대를 비웃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은 지금의 삶에서 영호는 여전히 삶에서 온전히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경찰을 그만두고 강 형사와 함께 시작한 사업을 성공시켰음에도 홍자는 바람을 피우고 그런 홍자를 영호는 흥신소를 통해 감시하다 현장에 들이닥쳐 폭력을 휘두르며 정작 본인도 회사의 비서와 바람을 피는, 순탄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나아가 여전히 홍자의 기도에 땅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는 영호는 집들이 도중 뛰쳐나가 사라진다. 온전히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있지 않기에 영호의 삶은 더욱 비극적으로 보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시간 역행에 따른 어긋남에서 느끼는 관객의 불편함은 더욱 커지며 이에 따라 수치심으로 가득한 1980년대에 관객 역시도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소풍-면회-기도-고백-삶은 아름답다-사진기-야유회 순으로 흘러가는 영호의 삶을 관객은 기차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며 보게 된다. 이때 관객은 삶에 만족감을 느끼나 동시에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으로 살아가는 영호의 모습에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거부감은 기차로 영호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는 관객에게 영호의 삶을 통해 보게 되는 1980년대의 알리바이를 정당화를 위한 알리바이가 아니라 죄의 변명으로서 알리바이로 느껴지게 한다. 그렇기에 삶에서 보이는 영호의 행동은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대사에서 이어져 안타깝지만 막상 똑바로 보기에는 부끄러운 행동으로 느껴진다. 현재에서 자신의 죄와 죄책감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돌려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그의 핏발 선 절규는 마치 언젠가 한 번 와본 것 같다는 데자뷰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즐기며 눈물을 흘리는 영호의 클로즈업된 얼굴로 이어진다. 이러한 결말은 결국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며 현실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는 순수함을 잃은 것에 안타까움을 더한다. 풍족한 생존을 위해 순수성을 희생한 삶은 수치심으로 가득한 1980년대를 알리바이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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