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사탕>에서 1980년대의 수치심에 대해 알리바이를 제시함에도 정당화 대신 더 깊은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기차를 통한 시간 역행에 있다. <알리바이 연대기>에서는 기차와 비슷하게 자전거라는 매개체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두 콘텐츠를 비교하면 더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박하사탕>에서 기차는 선로에 선 영호를 침과 동시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영호의 절규를 실은 기차는 언뜻 보면 마치 앞으로 달려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크린을 가르는 선로 좌우를 보면 주변 풍경이 되감아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에 따라 관객은 기차를 통해 천천히 영호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여기서 '언뜻 보면'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스크린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나아가는 선로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그저 나아가고 있으며 관객은 스크린에 떠올라 있는 기차가 머리인지 꼬리인지 혹은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이따금 스크린의 좌우에서 거꾸로 달리는 자동차, 다시 떨어졌던 나무로 돌아가는 꽃잎, 개와 함께 뒤로 달리고 있는 아이 등이 나올 때서야 관객은 기차 역시 뒤로 되감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언뜻 보면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관객이 보고 있는 영화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에 맞춰 기차 역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다. 거꾸로 무언가 달리고 있는 그 무언가들도 창문을 스쳐가는 그림자와 같아 스크린의 중앙에서 되감아지고 있으나 나아가고 있는 기차의 모습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되감아지고 있으나 영화의 시간은 나아가고 있으며 이에 맞춰 기차 역시 되감기와 나아감 사이에서 끊임없이 어긋나고 있는 것이다. 즉,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영호의 절규에서 느껴지는 어긋남은 곧 기차라는 매개체를 통해 보이는 어긋남과 상호작용해 관객에게 계속해서 영호의 삶을 제대로 직시하라는 말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호가 다시 돌아가려는 것이 삶과 순수성에 대한 개인의 회환 때문이지 죄책감에 대한 뉘우침으로 다른 선택을 하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니라는 점을 보라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은 봄은 단순히 관조하거나 감상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선택에 대한 질문과 같다. 현실에서 관객은 기차를 타고 끊임없이 되감아지는 1980년대의 수치심을 직면해야 한다. 그러면서 되감아지며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나아가고 있는 기차와 같이 나아가야 하는 현실의 관객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돌아갈 수 없는 가운데 당신은 앞으로 현실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생존을 위해 순수성을 잊을 것인가? 순수성을 잊는다는 수치심마저 잊은 채 스스로 삶의 죄인이 될 것인가?
출처. 왓챠피디아
<알리바이 연대기>의 자전거는 <박하사탕>의 기차와 비슷하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 순간을 살았던 아버지 '태용(남명렬 분)'은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었다는 정체성의 알리바이와 마찬가지로 생존과 순수성 사이의 고뇌라는 알리바이로 현대사를 살았던 자신을 변호한다. 태용에게 한국 사회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일본과 달랐고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는 전쟁 중 탈영해야 했으며 민주화 운동은 멀리서 지켜만 봐야 했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충실히 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학교와 집을 오가며 보이는 것들을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야 했다. 그에게 한국 사회에서 삶은 자전거의 바퀴와 같이 모나지 않은 채 매일 잘 그리고 똑같이 굴러가기만 하면 되었다. 즉, 태용의 자전거는 바퀴가 달렸음에도 나아가지 않은 채 정체된 듯하다. <박하사탕>의 기차가 스크린을 가로질러 되감아지고 있다면 태용의 자전거는 무대를 가로지르며 되돌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기차와 자전거는 바퀴가 달렸음에도 각각 스크린과 무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에 따라 두 물체는 시공간을 넘어 서로를 연결해 변화를 촉발하려는 매개체보다는 그저 그 공간에 묶인 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오브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객이 <박하사탕>에서 영호의 삶을 변호를 위한 알리바이가 아니라 1980년대의 수치심을 보이는 알리바이로 보는 것처럼 <알리바이 연대기>에서 태용의 삶도 수치심을 보이는 알리바이처럼 보게 된다. 두 콘텐츠에서 인물의 삶이 수치심에 대한 알리바이로 보이는 출발점은 조금 다르긴 하다. <박하사탕>은 영호가 한국 사회의 소시민이자 약자라는, 관객과 같은 혹은 비슷한 정체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영호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자라는 자신의 출신마저도 잊고 고문 경찰이 되고 나아가 방탕하고 방종한 사업가가 된다. 이러한 영호가 기차를 타고 자신의 삶이 이렇게 망가진 것에 대한 알리바이로 과거를 보여주는 행위 자체는 일종의 제 얼굴에 침 뱉기와 같이 되는 것이다. 즉, 영호와 같은 혹은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관객이 영호의 삶을 욕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같은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반면 <알리바이 연대기>는 태용이 끝내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경계인으로 남겨뒀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태용은 일제강점기 말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출생부터 시작해 한국 사회의 중요 순간마다 탈영과 같은 회피로 삶을 보낸 사람이다. 태용은 한국 사회와 계속해서 일정 거리를 두려고 했으며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어딜 가든 사람이 많은 곳에 가 중간만 하라는 말을 해도 그렇게 살지 않는 것에 괘념치 않은 인물이다. 즉, 그는 격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순수성을, 다르게 말하면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공동체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생성하지 않은 것이 수치심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죽기 직전 아들 '재엽(정원조 분)'에게 자신의 삶을 천천히 회고하는 태용은 삶에 대한 회한을 드러내기 보다 담담하게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읊조릴 뿐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과 재엽의 삶 사이에 거리를 두려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재엽의 삶은 이제 자신의 삶과 무관하게 재엽 본인의 선택으로 이뤄지는 것이라는 듯.
출처. 국립극단 홈페이지
결과적으로 <박하사탕>의 기차와 <알리바이 연대기>의 자전거는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스크린, 무대 너머 현실의 관객이 선택하도록 하는 매개체이다. <알리바이 연대기>의 자전거는 태용과 다른 정체성을 가졌으되 재엽과는 비슷한 정체성을 가졌을 관객에게 선택을 하도록 하는 매개체이다. 태용에게 자전거는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수단이자 동시에 사회와 거리를 둘 수 있도록 한 수단이다. 하지만 태용은 죽음의 순간까지 자기 세대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던 이야기를 담담히 말할 뿐 재엽에게 자신과 같이 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러한 알리바이가 있었던 세대라는 점만 밝힐 뿐이다. 그렇기에 이제 재엽의 자전거는 오로지 재엽의 선택에 따라 굴러갈 뿐이다. 태용과 달리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재엽에게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그러한 삶에서 어떤 알리바이를 만들 것인지, 그 알리바이는 정당하다 할 수 있는지는 모두 재엽의 선택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박하사탕>의 기차는 영호와 동일한 혹은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관객에게 선택을 하도록 하는 매개체이다. 영호와 같이 한국 사회의 소시민이자 약자이기도 한 관객에게 사회에서 당신이 비록 약자일지라도 스스로 삶의 죄인이 되는 길을 갈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 절규한들 스크린을 가로지르는 되감아지고 있되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기차처럼, 되감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고 있는 실제 영화처럼 삶도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에 흐르고 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삶에서 관객에게 영호의 삶을 정당성과 수치심 중 무엇을 위한 알리바이로 볼 것인지를 영화는 질문하는 것이다.
<박하사탕>과 <알리바이 연대기>는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나 지금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정치적 혼란기에서 경제적 생존을 위해 살아야 했던 과거와 비교해 오늘날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시대이다. 어떤 명확한 진실이 밝혀지면 수치심을 일으키는 80년대를 청년으로 살아야 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지금의 우리는 80년대에 대해 수치심을 느낄 일도 없거니와 어떤 거대한 수치심을 느낄 만한 공동체적 상황을 맞이한 바도 없다. 그렇기에 <박하사탕>과 <알리바이 연대기>가 의미 없게 느껴질 법도 하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오히려 기성세대보다 다양한 방면에서 수치심을 일으키는 일에 노출된 세대이기도 하다. 경제 성장은 개인의 성장으로 치환되었고 민주화는 젠더, 세대, 환경 등 다양한 문제로 파편화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 둘 중 하나가 아니라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회색 분자이다.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불안감 속에서 타인을 경쟁의 대상으로 볼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순수성과 책임보다 뻔뻔함과 생존을 강조한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의 '나'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이 정당화 되는 시대. 우리는 너무 많은 수치심에 노출되면서 수치심에 면역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출처. 국립극단 홈페이지
<알리바이 연대기>는 태용과 재엽이 각자의 자전거를 끌고 가다 서로를 지나치고 마지막에는 서로를 뒤돌아 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태용과 재엽의 삶은 이제 완전히 단절되었으되 재엽은 지나간 태용의 삶을 거울 삼으면서도 자신의 방식으로 자전거를 타며 살아갈 것이다. <박하사탕>은 절규하며 핏발선 눈에서 눈물을 흘리던 영호의 얼굴과 정반대로 평안한 표정으로 멀리서 야유회를 즐기는 노동자 동료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영호의 올굴을 클로즈업 하며 끝이 난다. 하지만 영호도 관객도 과거 가장 찬란한 시절, 그러니까 리즈 시절이라고 하는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 시절에서 지금 현재로 오기까지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이고 이제 다시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는 확실하다. 그 선택이 곧 당신의 삶에서 수치심을 위한 알리바이가 되거나 삶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는 순수성으로 남을 것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알리바이 연대기>와 <박하사탕>은 우리에게 1980년대라는 거대한 민족적, 공동체적 수치심을 일깨운다. 그러면서 이제 민족에서 세분화된 개인에게 묻는다. 수치심이 쌓여 만들어졌을 당신은 이제 어떤 알리바이를 만들며 살아갈 것인가? 술에 힘을 빌어야 겨우 분노를 토할 수 있고 똑바로 쳐다보기에는 두려워 옆으로 돌아누운 것도 모자라 곁눈질로 확인하는 것조차 꺼려지게 될지, 저 멀리 들려오는 동료의 노래 소리를 천천히 음미하고 지나가다 보이는 풀꽃에 아름답다 말하며 입에 들어온 박하사탕에 순수하게 상쾌하다 느끼게 될지. 삶의 알리바이가 수치심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