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례적인 현상이고 이례적인 영화인 듯하다. 글을 쓰는 8월 11일자 기준,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개봉 10주차 상영을 기록, 약 20만 관객을 동원했다. 작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2023)이 한국 기준 15주차 상영, 약 50만의 관객을 동원하며 <브로커>(2022)를 제외하면 고레에다 감독의 한국 개봉 작품 중 가장 흥행한 작품이 된 바 있다. 그와 비교하면 수치적으로는 한참 모자르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에 대한 한국 관객들의 인지도를 생각해보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10주차 상영과 20만 관객 동원이 더 놀라운 일이라 생각된다. 특히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013년 <언더 더 스킨>(2013) 이후 무려 10년이 지나 나온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장편이라는 점에서, <언더 더 스킨>이 국내에서는 이동진 평론가의 5점 만점 영화 중 하나라는 것을 제외하면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은 아니라는 점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기록은 이례적이라 생각된다. 더군다나 중동 지역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분쟁에 따른 팔레스타인 지역의 학살로 중동 전쟁 발발에 대한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한국에서 이례적인 기록을 세우고 있어 더욱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분쟁과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이례적인 흥행이 서로 연관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둘 사이 인과관계가 있을지는 알 수 없기에 그저 꿈보다 해몽일 뿐이다.
그럼에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흥행이 빛을 바래는 것은 아니다. 인과관계가 어떻든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흥행은 홀로코스트와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떠오르게 할 것이고 이는 팔레스타인 분쟁의 모순을 떠오르게 할 가능성이 있다. 문화 콘텐츠의 가치에는 어떠한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여 현실화하는 것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문화 콘텐츠가 지닌 현실화 가능성과 관련해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피해자 중심으로 재현한 이전 홀로코스트 영화의 영향권 아래에 있으면서도 그들과는 다른 새로운 재현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재현 가능성은 과거와 달라진 유대인의 현재 위상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과거에 그들(나치)이 무슨 짓을 했는지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고 수상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이와 비슷하게 평론가 정성일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 씨네토크에서 "우리는 대부분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이곳(영화관)에 앉죠. 하지만 어떤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하기 위해 우리 앞에 마주하기도 합니다."라고도 말한 바도 있다. 즉,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재현 가능성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질문을 하며 어떤 가능성을 현실화하려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처럼 질문한다면 다음과 같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1. 피해자 가능성이 아닌 가해자 가능성의 공포: 이전 홀로코스트 영화를 계승하며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전 홀로코스트 영화와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홀로코스트의 비극성을 재현하는 영화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상영하는 어느 상영관이든 감독의 의도에 따라 영화 시작 후 약 2분 11초간 검은 화면과 사운드만 나오며 영사 사고가 아니라는 안내문이 있다. 안내문대로 영화가 시작하면 관객은 기이하면서도 찢어지는 듯한 사운드를 들으며 어두운 동굴을 통과한다. 영상에서 2분은 짧은 것 같지만 긴 시간이다. 특히 어두운 상영관 내에서 불안감과 공포를 조성하는 사운드만 들리는 2분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지옥과 같은 2분 동안 관객은 동굴이 대체 언제 끝나는지 동굴의 끝에서는 무엇을 볼지 알 수 없어 공포스럽다. 대체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불안과 공포가 무색하게 동굴에 끝에서 관객은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떠오르는, 어느 일가족의 나들이를 보게 된다. 불안과 공포의 시청각에서 평범한 일상의 시청각으로 바뀌는 낙차. 모든 것이 평화롭기 그지 없는 강가와 푸른 숲에서 일가족은 근심, 걱정없이 물놀이를 즐기고 꽃을 꺾으러 다닌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관객은 이러한 평범성에서 완전히 반대되는 공포를 보게 된다. 나들이를 즐기던 일가족이 거대한 회색벽으로 둘러싸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로 옆 저택에 거주하는 나치 독일 회스 중령의 가족이라는 것에서 거대한 낙차의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가족이 현실의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서 거대한 낙차의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아버지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 분)의 생일날 아침 가족들은 다같이 깜짝 선물을 준비한다. 자식들을 학교에 보낸 어머니 헤트비히 회스(산드라 휠러 분)는 막내 아들을 안고 다니며 정원을 가꾼다. 이들의 삶은 소름끼칠 정도로 현실의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과 비슷한 리듬 속에서 진행된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아름다운 저택과 정원의 배경으로 나치 군복을 입은 이들이 오고가며 철조망이 처진 거대한 아우슈비츠의 회색벽이 처져있다는 것 뿐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평범성은 관객에게 이질적이다. 잠시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전에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을 살펴보자. <쉰들러 리스트>(1993), <인생은 아름다워>(1997), <피아니스트>(2002),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2008) 등. 이들 홀로코스트 영화들은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유대인-나치라는 피해자-가해자의 구도에서 피해자를 중심으로 홀로코스트를 재현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홀로코스트 재현은 필연적으로 피해자인 유대인들이 나치에 의해 어떻게 삶을 파괴당하는지를 재현하게 된다. 기독교라는 거대한 종교·문화의 영향 아래에 있는 유럽의 역사에서 유대인은 예수를 살해한 민족으로서 언제나 차별과 핍박의 대상이었지만 홀로코스트는 그러한 차별과 핍박의 역사에서도 완전히 궤가 다른 사건이다. 이른바 게르만 민족이라는 허구의 민족적 정체성의 허구적 순수성을 위해서 전쟁 기간 중 전쟁과는 별개로 자행된 계획적 학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획적 학살인 홀로코스트에 대해 기존 영화들은 다양한 파괴의 이미지로 나치 독일에 의해 인간성을 상실하는 혹은 상실한 유대인을 재현했다.
유대인을 중심으로 홀로코스트를 재현한 기존 영화의 목적은 피해자 유대인의 사건과 역사를 기억하면서 다시는 그러한 비극적 사건과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피해자 중심의 재현이 가진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피해자의 삶을 통해 비극적 사건에 대한 관객의 감정이입을 극대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현이 윤리적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피해자 중심의 재현은 피해자를 하나의 오브제이자 피사체로 만들어 이미 인간성을 상실한 피해자에게서 다시 인간성을 상실시킨다는 점에서 2차 가해로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피해자의 삶을 스크린에서라도 주체로서 재현해 관객이 직시하게 만들어 피해자가 상실한 인간성을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 일깨우는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재현의 윤리성 문제와 관련해서 피해자 중심의 재현은 크게는 생산자인 제작자가 어떻게 연출했으며 수용자인 관객은 어떻게 판단하는지가 교차하는 문제이기에 절대적인 정답을 상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피해자 중심의 재현을 통해 기존 홀로코스트 영화는 관객에게 조금이라도 더 직접적인 변화를 촉구하려 했다고 생각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이론을 떠올려본다면 비극의 핵심은 사건에 대한 관객의 감정이입을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 주인공들은 영웅이지만 평범한 인간과 같은 아주 사소한 실수로 비극을 맞이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주인공들은 평범한 인간들이며 자신의 욕망에 의한 행동으로 비극을 맞이한다. 즉, 비극적 사건에 관객이 감정이입을 하는 가장 큰 요인은 해당 사건이 관객 자신에게도 발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다시 말해 불안과 공포에서 기인한다. 어쩌면 '나' 역시도 아주 사소한 어떤 일로 슬픈 비극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직접적으로 밀착되어 있는 불안과 공포.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불안과 공포에 관객이 감정이입을 통해 카타르시스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일상에 돌아가는 것은 하나의 질병이기에 황정민 배우의 갑.분.싸마냥 낙차를 통한 감정적 해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되 신과 운명에 순종하며 인간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세계관을 내재한 그리스적 민주 시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홀로코스트는 인류사에서도 굉장히 이질적인 사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은 개인에 국한된 비극으로 관객 개개인에게 밀착된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하고 이를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집단적 비극이다. 특히 홀로코스트는 수치로만 봐도 고대 그리스 연극의 비극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집단적 비극이다. 이러한 비극의 정신적 충격은 개개인의 감정적 해소는 가능할지라도 이성과 정신에 남는 잔상(殘傷)을 해소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피해자 유대인 중심으로 홀로코스트를 재현한 기존 영화는 관객들에게 계속해서 비극의 잔상(殘像)을 남겨 해소할 수 없는 잔상을 남긴 것과 같다. 인류 전체의 집단적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피해자인 유대인의 삶을 관객에게도 상처로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콘텐츠와 그 영향력이 수적으로든 질적으로든 계속해서 증가해 범람하는 현실에서 관객에게 미치는 피해자 중심 재현이 지닌 영향력의 역치는 계속해서 높아질 수밖에 없다. 역치가 높아진다는 것은 곧 연출에 의한 자극, 오락성 등의 문제와 연결되어 오락적 소비라는 재현의 윤리 문제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재현은 기존 홀로코스트 영화와는 정반대이기에 이질적이고 그렇기에 더 공포스럽다. 나아가 이 공포는 관객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마주해야 하는 공포이다. 기존 홀로코스트 영화와 다르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나치 독일의 가족을 중심으로 홀로코스트를 재현하고 있다. 이러한 가해자 나치 독일을 중심으로 재현한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올리버 히르슈비겔 감독의 <다운폴>(2004),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의 <퓨리>(2014) 등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언급한 세 영화에서 알 수 있듯 가해자 나치 독일을 중심으로 재현한 영화를 홀로코스트 영화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가해자 나치 독일을 중심으로 재현한 영화는 보통 가해자인 나치 독일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몰락하는지 초점을 맞추거나 용서할 수 없는 악당 나치 독일에게 어떻게 복수하는지가 주요 골자이기 때문이다. 이들 영화에서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중심 사건이 아니라 나치 독일의 전범 악행 중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영화 내에서 굳이 중요 사건으로 재현되지 않고 언급만 되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아도 된다. 이미 관객은 홀로코스트를 매우 당연한 나치 독일의 악행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의 소장인 회스 중령과 그 가족의 일상을 중심으로 홀로코스트를 재현한다. 단순히 가해자인 나치 중령 가족을 중심으로 재현한 것만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현장 자체를 스크린에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택에서 평범하게 정원을 가꾸는 헤트비히, 정원을 뛰어다니며 장난을 치는 아이들, 당연하다는 듯 소각 장치에 대해서 회의를 하는 루돌프 등 가해자들의 평범한 일상만을 집요하게 보여줄 뿐이다. 대신 수용소 벽 너머 유대인들의 실상을 청각화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청각화는 단순히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의 청각화가 아니라 이전에 있던 홀로코스트 영화의 계승이라 봐야 한다. 관객에게 홀로코스트의 시각적 재현은 영화 내적으로 홀로코스트 재현의 중심을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옮길 뿐이며 나아가 굉장히 익숙하기에 잔상(殘傷)을 남길 수도 없다. 그렇기에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홀로코스트를 청각화해 재현하면서 이전 홀로코스트 영화가 관객에게 남긴 잔상(殘像)을 자극해 이성과 정신에 남은 상처를 후벼판다. 수용소 벽 너머에서 회스 가족은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지만 계속해서 벽을 넘어오는 학대와 고문을 당연시하는 나치 군인들의 고성, 나치 군인들의 폭력에 고통스러워 하는 유대인의 신음, 밤낮없이 작동하는 소각 장치를 뚫고 들려오는 유대인의 비명을 듣고 있다.
즉,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기존의 홀로코스트 영화와 다르게 관객이 피해자 유대인의 삶이 자신에게도 발생할 수 있다는 공포가 아니라 가해자 회스 가족의 삶이 자신의 삶일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끼게 한다. 가해자인 회스 가족은 밤낮으로 일상 속에서 유대인들의 비명을 듣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유대인들의 비명은 일상에서 가끔 들려오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같다. 삶의 에너지를 쓰는 낮이건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밤이건 수용소 너머 소리는 회스 가족에게 일상과 같다. 이따금 어두운 밤하늘을 검붉게 태우는 소각 장치의 불길이 비명과 함께 넘어오지만 루돌프는 저택을 돌아다니며 불을 끄고 아이들은 개의치 않고 잠을 청하며 헤트비히는 루돌프에게 이탈리아 여행을 추억하며 농담을 할 뿐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회스 가족의 일상에서 바로 옆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현실은 보이지 않지만 관객은 회스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에서 유대인들의 비명을 통해 떠오르는 과거 홀로코스트 영화들의 이미지가 남긴 잔상을 보게 된다. 동시에 그러한 잔상을 잊고 있던 자신들에게서 가해자 회스 가족의 파편을 보게 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러한 가해자의 일상에서 관객이 극단적으로 공포스러운 순간은 회스 가족 사이에서 가족애나 죄의식을 회피하는 인간성이 보일 때일 것이다. 수용소 근처 강에 아이들과 놀러갔다가 소각 장치에서 흘러나온 뼈와 가루들로 강물이 잿물이 됐을 것을 염려해 급히 아이들을 강물에서 빼내는 루돌프,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였음에도 다른 임지로 떠나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는 루돌프, 그런 루돌프에게 전쟁이 끝나면 시골로 내려가 오래전부터 살기로 한 전원 생활을 시작하자는 헤트비히 등. 루돌프와 헤트비히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가족들의 일상과 관계일 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자행하고 있되 무시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런 인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 가족은 자신들이 얼마나 커다란 죄를 짓고 있는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단적으로 영화에서 비명어린 불길을 참지 못하고 도망치듯 새벽 첫 차를 타고 떠난 엄마의 편지를 읽은 헤트비히는 편지를 읽고는 난로에 태워버렸을 뿐만 아니라 저택에서 일하는 폴란드인을 붙잡고 남편에게 남편에게 말만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태워버릴 수 있다고 말하며 분노를 푼다. 곧 시행될 유대인 학살 작전에 자신들의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는 전근을 간 회스의 전화에 헤트비히는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며 시덥잖은 전화를 했다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파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회스는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마치 속에서 무언가 게워내듯 갑자기 토를 하고는 어두운 복도를 응시한다 곧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이렇듯 회스 가족은 가족애를 가지고 있고 특히 죄의식은 무의식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평범한 이들이다. 자신들의 삶이 잘못됐다고 느끼지 않으며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껴질 때면 분노로 이러한 느낌을 태워버리거나 자신들의 성과로 여기며 덮어버리거나 아예 관계가 없다 생각하며 무시한다. 그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 평범한 이들이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집단적 비극인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다. 이러한 평범한 악은 러우 전쟁,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 등을 통해서 여전히 현실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즉,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기존 홀로코스트의 피해자 중심의 시각적 재현 이미지를 가해자 중심의 청각적 재현으로 계승한다. 이러한 청각적 재현은 관객 입장에서 청각의 주체인 가해자가 자신에게 덧입히는 공포로 이어진다. 그저 평범하게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실제로는 우리 주변의 비명을 새 지저귀는 소리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관객에게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재현하는 비극은 관객에게 해소 가능한 공포로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 현실에서 그렇게 살고 있다고 혹은 그렇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각하게 하는 비극적 공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