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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Aug 16. 2024

학살의 과거에서 묻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

홍대. KT&G 상상마당. 신촌. CGV. 존 오브 인터레스트.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글은 2편으로 나눠 연재됩니다. 이전 글을 읽고 오시길 바랍니다.


2. 가해자 가능성을 안고 관찰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필연적으로 관객이 관찰하도록 만든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흔히 인식하는 이야기로서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회스 중령과 가족들이 최악의 학살이 자행되는 곳과 하나를 사이에 살아가는 모습을 그저 관찰하는 것에 가깝다. 서사 대신 관찰에 가깝다 느껴지는 이유에는 회스 중령과 헤트비히 어느 쪽도 전체의 포커스를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로 보이는 시선에서 회스 가족의 아우슈비츠 삶은 대체로 인물의 전신을 중심으로 마치 가족의 일상이 사진으로 남겨지듯이 보여진다. 수영장 파티 회스가 헤트비히에게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야 한다는 소식을 말할 때, 갑작스럽게 전근 내용을 듣은 헤트비히가 당황과 분노를 느낄 때, 수용소의 라일락 덤불을 훼손하지 말라는 내용의 방송으로 회스가 엄포를 놓을 등. 특정 사건에서 인물이 어떤 감정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러한 행동에 상대방은 어떤 감정으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조각조각내지 않는다. 그저 사건의 순간을 멀리서 관찰할 뿐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극영화임에도 관찰하는 시선에 의해 가해자인 인물들에게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영화이다.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에 대한 영화라는 사실을 잠시 지운다면 유대인을 소각하는 소각장의 구조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수용소의 미관을 위해 애쓰는 소장으로서 모습과 자식들의 건강 및 교육을 더 신경쓰는 평범한 아버지로서 모습은 루돌프의 삶을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2차세계대전 중 독일 군인 남성의 삶으로 환원하는 것 같다. 아우슈비츠로 끌려온 유대인들의 옷 중 비싼 밍크코트를 빼내 입어보는 모습과 정원을 가꾸고 집안 살림을 돌보는 안주인으로서 모습을 보이는 헤트비히는 남편을 내조하는 평범한 2차세계대전 중 독일 상류층 여성의 삶을 살 뿐이다. 관찰자로서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의 모습을 조망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홀로코스트라는 비극보다 전쟁과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조차 잊게 만들고 평범한 일상을 강조해 어떤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본다는 감정까지 들게 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처럼 관찰자의 시선으로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보는 기분이 들게 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객에게 더욱 짙은 공포를 주게 된다. 그런데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가해자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가해자를 중심으로 홀로코스트를 재현한다고 했을 때 영화를 본 관객이 공포에 빠진다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그렇기에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비극적 특성은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진다. 인물의 삶에 관객이 본인의 삶도 근접해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느낄 때 비극의 감정이입과 카타르시스라는 일련의 과정이 작동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와 정서 역시 인물의 삶과 자기 자신의 삶이 근접해 있다는 느낌, 즉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 관객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피해자 중심의 홀로코스트 영화들에서 악마화된 나치들은 관객의 감정이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관객의 삶에서 자신을 핍박하는 악마 같은 누군가는 피해자 유대인-가해자 나치와 유사한 이미지라는 연결고리로 감정을 자극한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가 명확할수록 관객의 감정이입을 지나치게 강화하는 신파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핵심은 유사하다는 근접성이 관객에게 불안과 공포를 일으키며 이를 기반으로 감정이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감정이입과 거리가 먼 영화이다. 이야기에서 불가능해도 현실에서 가능한 사건보다 이야기에서 가능해도 현실에서 불가능한 사건이 더 바람직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해서 수 있듯 현실에 기반한 인위적인 세계, 즉 서사가 있을 때 관객이 더욱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관객은 문화 콘텐츠에서 현실을 엿보고 싶은 것이지 현실 그 자체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과거부터 문화 콘텐츠의 핵심은 비일상성에 있다. 일상을 벗어난 순간에서 느끼는 해방감이 있기에 문화 콘텐츠를 통해 현실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극영화임에도 관찰의 시선을 유지한다. 어떤 만들어진 이야기가 분명 존재하지만 관찰하는 카메라에 의해 이야기 대신 아우슈비츠 소장과 그의 가족의 삶이 현실화된다. 관객에게 회스 중령과 그의 가족은 분명 만들어진 현실의 피사체이지만 동시에 카메라의 시선을 경유한 관객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분명 관객은 모든 것이 어두컴컴한 극장이라는, 비일상적인 시공간에 앉아서 만들어진 이야기로서 영화라는 비일상적인 대상을 접하고 있으나 모순되게도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일상을 관찰하게 된다. 수용소의 회색 벽조차도 아우슈비츠 주변의 숲과 강처럼 자연스러운 배경이 되어 버리는 회스 가족의 일상은 그저 평화로운 전원 생활과 다름없다. 이러한 평범성은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인식적 벽을 허문다. 평범하다는 고리를 통해 회스 가족의 삶과 관객 자신의 삶 사이 유사성을 느끼는, 일종의 인식적 이입이 발생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거리를 두고 있기에 오히려 더욱 명확하게 보이며 자연스럽다는 지점이 더욱 강하게 인식된다. 이러한 인식적 이입은 관객에게 '평소'라는 추상적인 말로 명명되는, 자신을 포함한 삶의 일면을 엿보게 된다. 그렇기에 수용소 너머로 들려오는 유대인의 비명소리, 어떠한 경우에도 인식되지도 불려지지도 않은 기계처럼 돌아다니며 일을 하는 유대인, 나치의 눈을 피해 죽인 살아가는 유대인 등. 홀로코스트를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들은 회스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강화하는 감각적 자극이 된다. 일상에서는 감각하기 어려운 비일상적인 소리와 모습들은 오히려 그러한 비일상성조차 후경화하는 악의 일상성을 관찰하게 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결과적으로 인식적 이입에 기반해 회스 가족을 관찰하는 관객은 다른 의미에서 공포를 느끼게 된다. 영화가 개봉한 시점에서 관객이 살아가는 현실은 하루가 다르게 일상과 비일상의 모순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적인 펜데믹의 시기로 인종, 국가, 젠더에 따른 차별과 혐오가 극단화 되었고 펜데믹이 엔데믹으로 넘어가고 얼마 안 되어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현대전이 발발해 물류 대란과 물가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비일상성은 어느 순간 더이상 놀랍지 않은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최근 발발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분쟁으로 가자 지구의 학살이 알려졌을 때는 5차 중동 전쟁의 시작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으나 그러한 우려가 일상의 피부에 영향을 주는 비일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한 쪽에서는 비일상이 극단화되고 있으나 다른 한 쪽에서는 일상이 극단화되고 있는 모순. 그리고 극단화된 일상에서 비일상을 전혀 감각하지 못하는 모습.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객에게 보여준다. 회스 가족과 스크린 앞 관객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에도 일상적인 악을 감각하지 못하는 관객이 잠재적인 가해자이자 이미 가해자인 것은 아닌지를. 근접하지 않은 줄 알았던 가해자의 현실이 실제로는 근접해 있다는 감각에 의해 관객은 공포에 젖어든다.


3.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단순히 가해자의 현실이 유사하다는 사실만을 관객에게 전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파티에 참석한 루돌프는 계단을 내려가다 구토감에 멈춰섰다가 속에 든 것을 게워낸다. 그렇게 게워낸 회스는 갑자기 뭔가를 느꼈다는 듯 어두운 복도 저편을 바라보고 영화는 유대인을 학살한 장소와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유품을 전시해 나치의 행적을 보존하고 있는 현재의 아우슈비츠를 보여준다. 이러한 장면의 흐름은 마치 과거의 루돌프가 현재의 아우슈비츠를 본 듯한 착각을 준다. 이 흐름을 착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과거의 루돌프가 현재를 봤다 안 봤다는 논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아우슈비츠가 지나간 뒤 루돌프는 다시 내려가던 길을 간다. 그런 루돌프의 모습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해석이 있을 뿐이다. 단적으로 아우슈비츠의 모습을 봤다고 한다면 회스의 행동은 전쟁에 승리해 자신들의 행적을 전시한 것으로 인식했다는 극단적인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즉, 아우슈비츠를 봤네 못 봤네, 거기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꼈네 못 느꼈네는 지나치게 지엽적이고 피곤한 논쟁일 뿐이다.


여기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라고 말한 평론가 정성일의 말을 떠올려 보자. 그렇다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일종의 큐레이션이며 관객에게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해자인 회스 가족의 일상을 관찰하도록 한 것이 하나의 큐레이션이라면 관객에게는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파티에서 술을 거의 마시지 않은 루돌프가 구토를 했으며 그 다음 그의 대척점이라 할 수 있는 현재의 아우슈비츠가 회스와 대립되게 서있고 그러한 대립 구도를 관객이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객에게 구토를 하고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고 있는 루돌프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관객에게는 그저 복도에 서서 저편을 바라보는 루돌프의 전신이 계단의 조명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고 그 다음 마찬가지로 나치의 행적을 전시한 현재의 아우슈비츠도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즉, 관객은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나치 인물 다음 홀로코스트의 현장을 볼 수 있는 아우슈비츠를 차례로 보는 관람객이 된다. 잠시 영화를 앞으로 돌려 파티 전 루돌프가 속이 불편해 위장을 검사받는 장면을 떠올리자. 회스를 검사한 군의관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루돌프의 구토는 아무런 원인이 없는, 불가해한 구토가 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그런데 관객에게 루돌프의 구토는 인과가 없는 구토가 아니다. 영화에서 회스 가족은 수용소 너머의 사건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계속해서 그 너머의 사건을 감각하고 있다. 보이지 않느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그들 주변에 분명히 존재하며 감각되고 있다. 너머의 유대인들을 감각한 어머니의 편지에 헤트비히가 분노하는 것을 기억하자. 루돌프의 구토는 헤트비히의 분노와 같다. 무시하고 있는 감각이 무의식적으로 쌓이다 의식의 현실로 발현하는 것이다. 즉, 루돌프가 느낀 위장의 불편함과 밖으로 뿜어낸 구토는 자연스러워서 인식하지 못한 악이 현실에 드러난 것과 같다. 본인의 악을 인식하지 못하는 평범한 가해자는 자신의 흔적을 현실에 남기게 된다. 가해자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관객에게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마지막 큐레이션은 질문한다. 자신의 시선으로 관찰한 평범한 가해자와 그 흔적을 본 관객은 악의 일상성과 자신도 그러한 악의 공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이다. 모르는 것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알게 된 지금은 어떻게 살 것인가? 평범한 가해자 루돌프처럼 구토를 하고도, 어두운 복도 저편을 바라보다가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단을 내려갈 것인가? 일상에 자연화되어 있는 악을 알게 된 당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서론에서 서술했듯, 이러한 영화를 봤다고 해서 실제 현실에서 갑작스럽게 삶이 변화하지 않는다. 암울하게 말하면 문화 콘텐츠는 그저 어떤 현실의 가능성을 위한 씨앗에 불과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한국에서 이례적인 흥행 현상을 보이든. 유수의 영화제에서 다양한 수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고 실제로 수상을 하든.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떨리는 목소리로 유대인 제작자 앞에서 가자 지구의 학살을 떠오르게 하는 수상 소감을 하든. 어떤 극적인 변화는 없다. 결국 문화 콘텐츠는 순간이라는 일상에서조차 찰나인 비일상일 뿐이고 이를 향유한 이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남긴 공포의 잔상은 영화를 본 이들의 무의식으로 남아 질문할 것이다. 악의 일상성을 인지하게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하나의 숙제 아닌 숙제가 남는다. 단순히 예술 영화를 즐기고 있다는 힙한 누군가로 남을지, 그러한 예술 영화가 남긴 질문에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고민할지. 어느 쪽이든 삶은 여전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삶에서 어느 순간 자신의 구토를 보고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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