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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Feb 19. 2025

아노라 단상

연남. 라이카시네마. 아노라.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자신조차 보지 않던 밝음을 바라봄에 무너지는 찌질함(4.0)


강렬한 인상만큼이나 잘 지워지지 않는 영화이다. 2024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는 영화 시작부터 화려하지만 어두컴컴한 매춘부들의 삶을 조명한다. 귀가 뚫릴 것 같은 클럽 노래와 휘황찬란한 조명이 가득한 공간에서 매춘부들은 손님인 남성들과 돈을 매개로 평등하게, 어떤 경우에는 관계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공간을 장악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춘부들의 공간은 시청각적으로 꽉찬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 그들의 공간은 시각적으로 어둠, 즉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곳이다. 그들은 시청각적으로 귀 가까이에 대고 목소리를 내어야, 눈 가까이에서 몸을 밀착해야 간신히 자신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들 수 있다. "아노라(마이키 매디슨 분)"는 자기 이름의 뜻 중 "빛", "밝다"라는 것과 완전히 정반대로 오로지 어둠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 스스로를 소개할 때도 본명인 아노라가 아니라 스트리퍼이자 매춘부 예명인 "애니"로 소개한다. 이로서 아노라로 대변되는 매춘부들은 시청각적으로 자신을 지우는 공간에서 존재론적으로까지 지워진다. 지워진 그들은 아무리 남성과 관계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주도하지 못하며 나아가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는 혹은 없어진다고 해서 아쉬울 것 없는 존재일 뿐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그렇기에 <아노라>에서 '이반(마크 에이델슈타인 분)'과 아노라의 성행위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향한 갈구로 연출된 행위에 가깝다. 이반은 아노라를 통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하기 싫은 공부나 시키는 부모에 대한 어린 아이스러운 저항의 쾌감과 어떤 체위나 행동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매춘부를 산 고객으로서 성적 쾌감을 추구할 뿐이다. 아노라 역시 이반의 자본과 재벌 2세라는 경제적, 사회적 자본에 대한 쾌감을 바랄 뿐이다. 이에 따라 이반과 그의 부모, 아노라와 '가닉(카렌 카라굴리안 분)', '토로스(바체 토브마시얀 분)', '이고르(유리 보리소프 분)' 사이의 권력 구도, 자본가와 노동자의 권력 구도 속에서 쾌감으로 시작되고 유지되는 관계는 어떠한 저항적 요소도 갖고 있을 수 없다. 드러난 감정이 헤집어지고 감춰둔 쾌감과 욕망이 너저분하게 펼쳐질 뿐이다. 그 과정에서 권력의 우위에 있는 이반과 그의 부모는 사건의 당사자임에도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거리를 두려고 하고 실제로 쉽게 거리를 두고 있다. 반면 아노라와 하수인 3인방은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가며 자신의 감정을 증명하거나 코가 부러져 가며 사건을 해결한다. 특히나 아노라와 이반의 관계에서 책임감이 없이 어린애 같이 행동했음에도 그저 이른바 꽃뱀에게 꾀임을 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반과 달리 신데렐라가 되려고 했든 혹은 실제로 이반을 사랑했든 동기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아노라의 행위와 감정은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꽃뱀으로 규정된다.


이고르와 아노라의 마지막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관객에게 내려지는 처벌과도 같다. 하수인 3인방 중 한 명인 이고르는 유일하게 아노라에 대해서 아무런 편견도 없는 것 같다. 이반과 이혼한 아노라가 이반의 별장에서 짐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이고르가 아노라를 대하는 모습은 이전에도 그랬지만 아노라가 일하던 스트립바의 남성들과는 다르다. 이른바 어떻게 해서 원나잇을 즐기려는 돈 없는 남성, 즉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며 접근하는 남성의 행위가 아니다. 이름의 의미, 할머니와 살았던 시절 등 시덥잖게 보이지만 누구나 쉽게 나누는 일상의 이야기를 할 뿐 아노라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헤어지기 전 평생을 함께 할 결혼의 증표인 반지를 몰래 건네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헤어지기까지 이고르의 행위에 아노라가 차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말 없이 그와 성관계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적어도 아노라가 결국 스스로 빛나는 것을 포기하고 매춘부로 돌아가게 된다는 얄팍한 결론만은 아닐 것이다. 매춘부로서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성적인 제스처 없이, 마치 빛이 있는 평범한 세계의 어떤 누군가로 대해주는 것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으로 느껴진다. 영화 내내 아노라가 찌질한 것은 싫다 말한다는 점, 즉 자신의 삶과 존재를 숨기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삶과 존재에 일종의 동정심이 비춰지는 것에 거부감을 보인 것을 기억하자. 숨기고 싶은 삶과 존재에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어디선가 등장할 백마 탄 왕자를 따라가는 것, 즉 희대의 인생 역전이라 여길 수밖에 없는 성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었음을 기억하자.


자신과 성관계를 하려는 아노라의 얼굴을 잡고 키스하려는 이고르는 충격적이어야 한다. 스트립바에서 매춘부로서 고객들과 성관계를 맺을 때, 이반과 쾌락을 탐닉하며 성관계를 맺을 때 그 누구도, 단 한 번을 아노라의 눈을 바라보며 키스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눈에 아노라라는 사람을 담으며 그 순간에 스쳐가는 감정일지라도 눈에 담긴 감정을 아노라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아노라는 돈을 받고 자신의 몸을 팔아 성욕을 처리해주는 매춘부, 즉 상품이었을 뿐이며 스스로를 애니라 부르는 아노라에게 그런 시선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노라의 삶에서 자연스럽다고 하여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아노라라는 '인간'으로서 정체성이 있기에 어쩌면 아노라는 인생 역전이라는 쾌락적 목표 외에 자본과 쾌락에 기반한 감정일지라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이반을 대했고 그에게서도 그런 감정을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이고르의 시선, 그러니까 자신을 똑바로 보기 위해 부드럽게 얼굴을 감싸쥐며 키스를 하려는 이고르의 행위는 원하지 않았지만 기다리고 있던 구원이었을 것이다. 자기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로 어둠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어둠에서 동정이든 사랑이든 감정에 이끌려 나오는 것을 찌질하다 여긴 자신의 찌질함을 비춰주는 그 시선에 그저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차가운 눈이 내리고 삑삑거리는 와이퍼 소리가 울려퍼질 바깥으로 나가게 될 것이나 그 전에 잠시만이라도 다른 누군가의 품에서 울어야 하는 사람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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