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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랑 Jan 02. 2023

돌아온 커서

작년에 갔던 커서가 죽지도 않고 돌아왔다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단조로운 일상을 남길 만큼 부지런하지 않고 스스로 재미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재미없게 느껴졌냐면. 몇 년 전 주제를 정하고 참여자들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북워크숍에 참여했다. 두 번째 참여 이후 어쩐 일인지 내가 쓴 글이 재미없다고 느껴져 ‘다음에는 내가 쓴 글로 책을 꾸려야지’ 했던 마음이 식었다. 그리고 한동안 글을 쓰고 읽는 것에 재미를 잃었다.

 

 며칠 전 책장 정리하던 중 발견한 워크숍에서 만든 책을 읽었다. 거슬릴 것 없는 내용과 문체가 괜찮았다. 그리고 나의 한 부분이 책으로 남겨져 있어서 좋았다. 다시 나의 것을 남기고 싶어 매일 짧게라도 오늘을 적기로 한다.


 깜박이는 커서를 보고 있으니 내가 처음으로 글을 쓰고 싶었던 때가 기억난다. 팬픽이 휘몰아치던 어릴 적, 나도 쓰고 싶은 마음이 번득하여 메모장을 열어 깜박이는 커서만 멀뚱히 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몇 분을 커서만 보다가 작가의 대단함을 느끼며 창을 닫은 기억이 첫 번째.


 왕복 4시간 걸리는 통근러 3년 차에 두손두발 들고 회사 근처로 방을 얻었다. 퇴근 이동 거리가 단축된 만큼 생긴 시간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집 근처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면서 시작된 쓰기. 다음 모임에 가져가야 할 글을 작성하느라 매일 퇴근 후 원룸에서 커서를 마주한 것이 두 번째.


 편해진 몸과 달리 마음도 통장도 너덜거리는 자취를 이어갈 수 없겠다 싶어 방을 정리했다. 통근러로 복귀 후 휴일에 북워크숍으로 책 만들 때가 세 번째. 지하철과 버스에서 시간과 사람에 눌려 집에 도착하면 어느 것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휴일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자는 의욕이 넘칠 때였다.


 두 권의 책을 만들고 의욕이 바닥까지 떨어진 채 몇 년이 지나고 다시 앞뒤로 바쁘게 움직이는 커서를 보고 있는 지금이 네 번째.

 깜박 거리는 몇 번의 커서를 보내고 내 것을 남기고자 하는 힘으로 다시 커서를 마주할 수 있어서 좋다. 글을 쓰고 읽는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있는 요즘이 금세 가지 않길 바란다. 이 시간이 빨리 가더라도 잠깐 멈추고 이야기를 모아 다시 쓰면 되니까. 천천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열해 본다.


 (지난해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마침 우표가 많이 생기기도 해서. 하고 싶은 말을 잘 정돈해서 보내면 마음이 좋은 의미로 묵직해진다. 커서를 마주할 힘은 진심으로 쓴 편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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