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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랑 Jan 04. 2023

런던 거리 헤매기

지도 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가는 시간


 여행의 후반부. 그 말은 휴대폰 지도를 들고 지나치는 사람을 경계하며 온몸으로 긴장을 내뿜은 지 세 달 째라는 것. 집을 나와 커다란 땅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며 산지 세 달.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진 나의 체력과 집중력에 이 땅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것이 속상했다.


 낯선 곳에 머무를 때 내가 언제 또 오겠어라는 말을 안 좋아한다. 한계를 미리 만들어 두는 것 같아서. 그래서 마주하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느슨한 일정을 보내는데 지도를 보느라 내가 지나온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짜증이 났다. 잊지 말자. 여기는 버지니아 울프의 나라. 버지니아 언니처럼 런던 거리를 헤매자고 재밌는 생각이 번득 들어 바로 핸드폰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목적지 없이 런던을 그냥 걸었다. 기울어진 해가 만드는 그림자로 시간을 가늠한다. 지나가는 사람의 표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해 보고, 익숙한 공간을 만나 반갑고, 가려고 했던 곳을 미리 만나 또 반갑고. 이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에 눈과 눈썹이 한껏 올라간다. 나의 눈과 눈썹이 한동안 내려오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 맥주 마시는 모습 때문이었는데 모두 바깥에 서서 맥주 한 병을 들고 작은 원을 만들어 이야기를 나눈다. 팀 회식을 하는 것처럼 20명 넘는 사람들이 만든 모습이 놀랍다. 가게 안에 자리가 텅텅 비었는데 무슨 규칙이 있는 걸까 궁금해하며 무리를 지나는데 다음 가게에서 같은 모습을 마주한다. 그렇게 걷는 동안 바깥에 서서 술을 마시는 무리를 계속해서 지나친다.


 날씨가 나쁜 것은 당연하고 날씨가 좋아도 가게 내부 자리를 선호하는 한국인은 너무 놀라 숙소 사장님께 여쭤봤다. 이유는 퇴근했는데 오늘이 금요일이고 날씨까지 좋아서였다. 더 놀라운 것은 안주 없이 저녁 먹기 전에 몇 잔만 마시고 헤어진다는 것이다. 퇴근 후 이야기 나누고 싶은 사람끼리 모여 한두 잔만 마시고 헤어지기. 크… 시끌벅적한 술자리가 아니라 마치 차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차 대신 술이 바뀐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든다.


 호기심이 눈에 잔뜩 들어온다. 해가 질 때까지 걷다가 가까이에 있는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왔다. 중간에 사 온 체리를 사장님과 나누고 방에서 달콤한 체리를 넘긴 후 남은 씨를 뱉으며 누워서 보내는 게으른 시간. 어떤 날은 화려한 낯선 것보다 사람에게 느끼는 고유한 낯섦이 더 크게 오는데 오늘이 그날이라며 웃는다. 남는 게 사진이라는데 이런 날은 사진도 필요 없다. 당분간 혹은 노인이 돼서도 이날을 기억할 때마다 나의 눈과 눈썹이 한껏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돼서도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라니. 버지니아 울프 당신은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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