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주의보
평소엔 방 정리의 필요성을 잘 못 느끼는 편이다. 내 나름의 필요와 이유에 따라 책상과 행거, 서랍 등이 정리되어 있어서 딱히 불편함을 못 느껴서다. 그런데 이런 나라도 가끔 방 청소를 해야겠다는 심각함을 깨닫는다. 온갖 책이 가득 쌓여 있는 책상과 아무렇게나 벗은 옷이 마구 걸쳐 있는 옷걸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는 거다. 뭐 자주는 아니고 두 달에 한 번 정도 마음먹고 대청소를 한다.
얼마 전엔 봄맞이로 책상 페인트칠을 해볼까 싶어서 물건을 모두 빼서 정리를 했다. 작은 방인데도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물건이 끝도 없이 나왔다. "이거 그렇게 많이 찾았었는데, 이제 발견하네"라거나 "이게 아직도 집에 있었네"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잡다한 물건들. 그런데도 쉽사리 쓰레기 봉지에 담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쓸 일이 없다는 것이 분명한 물건인데도 이상하게 발견하는 순간, "두면 언젠간 다 쓸 거야" "다 추억이 담긴 물건인데…"하며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거다. '물건 집착증'이라고나 할까. 정리하다가 초등학생 때부터 받은 편지를 담아둔 편지함을 발견했다.
초등학생 때 MRK라는 잡지가 있었다. 나중에 미스터케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린이들 필수 아이템 중 하나였던 이 잡지에는 그 당시 최고 인기의 아이돌 기사와 사진들로 가득했다. 하이라이트는 잡지의 뒷부분이다. 뒷부분에는 오려서 만드는 독특한 편지지가 가득했다. 오려서 접으면 입체 형태의 우유갑 모양의 편지지가 완성되기도 하고 아이스크림 편지지, 대일밴드 모양의 편지지 등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편지지였다. 최신호에 실린 아끼는 편지지 중에 예쁜 것들만 골라 친한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인천에 사는 친척 언니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책상 페인트칠을 다 마친 후 자리에 앉아 몇백 통이 넘는 편지를 차근차근 읽었다. 그때는 친하게 지냈는데, 이제는 이름도 가물가물한 친구들의 편지가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자꾸 꿈속에 나타난다며 심각하게 이야기를 쓴 편지도 있었고 다음에 피구 같은 편 하자며 칭얼대는 편지도 있었다. 요즘에야 할 말 있으면 카톡으로 보내면 되지만 그때는 말로 하기 그랬던 말을 편지지에 꾹꾹 눌러썼다. 매일 보는 친구들인데도 어찌나 그렇게 편지를 썼는지. 그때부터 무언가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했었나 보다.
확실히 요즘은 편지를 쓸 일이 많지 않지만, 특별한 날 친구에게 편지를 쓰곤 한다. 마음에 드는 편지지나 엽서를 사서 만년필을 들고 전하고 싶은 말을 쓰는 순간이 좋다. 말로 하는 것도 좋지만 글로 남기는 순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좀 더 오래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
그때 편지를 주고받았던 친구들은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다.
2017년의 덧붙임: 가끔 책상, 책꽂이 정리를 하다 보면 쓰다 만 편지지를 발견한다. 글씨가 이상해져서 구겨버리거나 뭔가 문장이 이상해서 다시 쓴 것들. 나중에 요런 편지들만 모아서 정리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