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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Nov 20. 2022

번아웃 3년 차, 퇴사를 결심하다

퇴사 좀 할 수도 있지.

2014년 1월 2일.

처음 출근한 날이 기억난다. 목요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첫날부터 실 주간회의에 들어갔고, 오가는 얘기들을 대충 주섬주섬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 회사에 정말 잘 왔다고. 내가 진짜 원하던 기획일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서비스기획자라는 커리어는 내가 처음으로 오롯이 내 의지로만 정한 인생의 스텝이었다. 고등학교를 정할 때, 대학교에 지원할 때, 전공을 정할 때 모두 부모님의 의지가 더 강했지만, 커리어만큼은 정말이지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싶었다. 서비스기획자는 불만족스러웠던 전공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파격적인 선택이었고, IT와 디자인을 모두 좋아하는 나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회사생활도 행복했다. 개발자와 디자이너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일하는 게 즐거웠고, 그 사이에서 대안을 제시하며 합의점을 이끌어내는 것도 즐거웠다. 똑똑한 신입사원이었고, 추진력 좋은 대리였다. 그렇게 차근차근 팀장이 될 줄 알았다.


그렇게 6년 차가 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번아웃된 내가 있었다. 정확히 어떤 이유로 번아웃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시니어가 되면서부터 요구받는 다양한 능력들이 버거웠던 것 같기도 하고, 때마침 옮겼던 팀이 너무 힘들었던 것도 같다(내가 지원한 거긴 했지만).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이 작용했던 거겠지. 어쨌거나 번아웃은 내 삶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힘들었던 당시에는 그게 번아웃인지도 몰랐다. 번아웃은 매일매일 야근하고, 하루종일 일 생각만 하는 사람에게 오는 건 줄 알았다. 아니면 체력적으로 '번아웃' 되어, 손가락 까딱하기도 힘든 게 번아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칼퇴했다. 회사에 1분이라도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칼퇴를 하니 체력적으로 힘들지도 않았다. 내가 그냥 의지가 약해지고, 게을러진 줄 알았다. 스스로 통제력을 잃었다고 생각해서 자책하기 바빴다. 팀원들 모두 바쁜 와중에 나만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생각에 열등감과 미안함만 느꼈다. 그러면서 우울증도 같이 왔던 거 같은데, 우울증에 걸렸단 사실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당시에 다른 팀원이 "매일 집에 가서 운다"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정말 안타까워했는데, 정작 내가 매일 우는 것에는 자각이 없었다. 그렇게 둔했다. 마음의 병에 대해 무지했다. (우울증/번아웃 교육은 국가에서든 회사에서든 정말 꼭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잊어먹을까 봐 당시에 작성해뒀던 우울증 증상. 이거 말고도 리스트가 한참 길다...


스스로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몰랐기 때문에 처음에는 병원에도 가지 않고 상담센터만 갔다. 약물 치료를 일찍부터 했으면 좀 나았을까? 어쨌든 우울증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나 공황발작이 몇 차례 오고 나서야 나는 병원에 갔고, 다행히 우울증은 서서히 좋아졌다. 하지만 번아웃은 좋아지지 않았다. 나는 이미 회사에, 업무에 흥미를 잃었다. 옛날 같으면 내 도전의식을 자극했을 어려운 프로젝트들이 다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업무 이야기가 다 귀찮아졌다. 열정 없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만 일을 하기 시작했다.


문득 커리어에 대한 위기의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태만하게 일해서 어엿한 시니어가 될 수 있을까? 팀장은 될 수 있을까? 아니, 정말 팀장이 되고 싶긴 한 건가? 아직 일한 지 10년도 안 됐는데, 여태껏 일한 날보다 앞으로 일할 날들이 더 많은데, 나는 그 긴긴 날들을 계속할 자신이 없어졌다. 신입 때는 커리어라는 산을 오르다 보면 정상에 무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차가 늘어가면서 주변의 선배들을 보니, 정상에 별 게 있는 게 아니더라. 아니 정상이 있긴 한 건가? 내가 기대하던 정상 위 보물상자는 없었다. 직장생활이란, 기약 없이 산을 오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밑으로 내려와야 되는 거였다. 손에 약간의 퇴직금만 남은 채로.


"3개월 백수생활 동안 느낀 점"으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이렇게나 생각이 같을 수 있다.


이렇게 덧없는 게 회사생활이라면,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도 받고 싶었다. 내가 만들고 있는 이 기능이 유저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줄까? 유저들의 인생을 얼마나 바꿨을까? 당시에 나는 배달 플랫폼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내가 몇 주, 몇 달간 고민해서 만든 기능이 고작 배달을 몇 분 빨리 해줄 수 있게 하는 거라면, 그게 대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 걸까? 내가 직접 배달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고작 몇 분을 위해서 내 머리털을 다 쥐어뜯으면서 일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2021년 3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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