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좀 할 수도 있지.
2014년 1월 2일.
처음 출근한 날이 기억난다. 목요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첫날부터 실 주간회의에 들어갔고, 오가는 얘기들을 대충 주섬주섬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 회사에 정말 잘 왔다고. 내가 진짜 원하던 기획일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서비스기획자라는 커리어는 내가 처음으로 오롯이 내 의지로만 정한 인생의 스텝이었다. 고등학교를 정할 때, 대학교에 지원할 때, 전공을 정할 때 모두 부모님의 의지가 더 강했지만, 커리어만큼은 정말이지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싶었다. 서비스기획자는 불만족스러웠던 전공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파격적인 선택이었고, IT와 디자인을 모두 좋아하는 나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회사생활도 행복했다. 개발자와 디자이너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일하는 게 즐거웠고, 그 사이에서 대안을 제시하며 합의점을 이끌어내는 것도 즐거웠다. 똑똑한 신입사원이었고, 추진력 좋은 대리였다. 그렇게 차근차근 팀장이 될 줄 알았다.
그렇게 6년 차가 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번아웃된 내가 있었다. 정확히 어떤 이유로 번아웃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시니어가 되면서부터 요구받는 다양한 능력들이 버거웠던 것 같기도 하고, 때마침 옮겼던 팀이 너무 힘들었던 것도 같다(내가 지원한 거긴 했지만).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이 작용했던 거겠지. 어쨌거나 번아웃은 내 삶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힘들었던 당시에는 그게 번아웃인지도 몰랐다. 번아웃은 매일매일 야근하고, 하루종일 일 생각만 하는 사람에게 오는 건 줄 알았다. 아니면 체력적으로 '번아웃' 되어, 손가락 까딱하기도 힘든 게 번아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칼퇴했다. 회사에 1분이라도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칼퇴를 하니 체력적으로 힘들지도 않았다. 내가 그냥 의지가 약해지고, 게을러진 줄 알았다. 스스로 통제력을 잃었다고 생각해서 자책하기 바빴다. 팀원들 모두 바쁜 와중에 나만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생각에 열등감과 미안함만 느꼈다. 그러면서 우울증도 같이 왔던 거 같은데, 우울증에 걸렸단 사실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당시에 다른 팀원이 "매일 집에 가서 운다"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정말 안타까워했는데, 정작 내가 매일 우는 것에는 자각이 없었다. 그렇게 둔했다. 마음의 병에 대해 무지했다. (우울증/번아웃 교육은 국가에서든 회사에서든 정말 꼭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몰랐기 때문에 처음에는 병원에도 가지 않고 상담센터만 갔다. 약물 치료를 일찍부터 했으면 좀 나았을까? 어쨌든 우울증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나 공황발작이 몇 차례 오고 나서야 나는 병원에 갔고, 다행히 우울증은 서서히 좋아졌다. 하지만 번아웃은 좋아지지 않았다. 나는 이미 회사에, 업무에 흥미를 잃었다. 옛날 같으면 내 도전의식을 자극했을 어려운 프로젝트들이 다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업무 이야기가 다 귀찮아졌다. 열정 없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만 일을 하기 시작했다.
문득 커리어에 대한 위기의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태만하게 일해서 어엿한 시니어가 될 수 있을까? 팀장은 될 수 있을까? 아니, 정말 팀장이 되고 싶긴 한 건가? 아직 일한 지 10년도 안 됐는데, 여태껏 일한 날보다 앞으로 일할 날들이 더 많은데, 나는 그 긴긴 날들을 계속할 자신이 없어졌다. 신입 때는 커리어라는 산을 오르다 보면 정상에 무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차가 늘어가면서 주변의 선배들을 보니, 정상에 별 게 있는 게 아니더라. 아니 정상이 있긴 한 건가? 내가 기대하던 정상 위 보물상자는 없었다. 직장생활이란, 기약 없이 산을 오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밑으로 내려와야 되는 거였다. 손에 약간의 퇴직금만 남은 채로.
이렇게 덧없는 게 회사생활이라면,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도 받고 싶었다. 내가 만들고 있는 이 기능이 유저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줄까? 유저들의 인생을 얼마나 바꿨을까? 당시에 나는 배달 플랫폼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내가 몇 주, 몇 달간 고민해서 만든 기능이 고작 배달을 몇 분 빨리 해줄 수 있게 하는 거라면, 그게 대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 걸까? 내가 직접 배달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고작 몇 분을 위해서 내 머리털을 다 쥐어뜯으면서 일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2021년 3월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