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었다.
"재분류 신청을 해보긴 하겠지만, 어려울지도 몰라요. 초록씨는 지금 위험군에 딱 핀포인트가 꽂혀 있거든요."
상담사분은 침착하지만 난처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서울로 이사한 지 두 달 남짓. 인천과 경기도에서 14년을 살다가 다시 돌아온 서울. 이사 오자마자 서울시 정책을 이것저것 찾던 차에 신청한 서울시 청년 마음건강 지원사업으로 하게 된 상담이었다.
신청할 당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불안한 상황이었고 모든 게 힘들고 무기력했던 탓일까. 그래서 자기 보고형 검사에 극단적인 대답들을 해버린 걸까? 정리된 서류 속의 나는 스스로 생을 끊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슬비가 내리는 아직 낯선 은평구를 30분 정도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돌아오다가 문득 자주 가는 채소가게가 눈에 띄었다. 집에 달걀이 떨어졌었지, 아마.
대란 30구 한 판과 떨이로 할인 중이던 흙 무 하나, 그리고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었던 황태채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고 작은 내 주방 앞에 섰다. 검색앱에 북엇국을 써넣고 게시글 두어 개를 훑어본 뒤 황태채 봉지를 뜯었다. 황태채는 물에 불려두고 무를 흰 부분과 파란 부분을 나눠 소분해서 쓸 만큼만 남기고 키친타월로 감싼 뒤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불어 난 황태를 꼭 짜서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가위로 적당히 잘라 볶았다. 어느 정도 볶다가 썰어놓은 무를 넣고 반투명으로 익을 때까지 볶는다. 탈 것 같으면 황태를 불렸던 물을 조금씩 넣어주면서.
볶아진 재료에 황태 불린 물을 붓고 강불로 시작해서 팔팔 끓어오르면 중불로 뭉근히 끓인다. 그동안 파를 꺼내 썰고 작은 밥그릇에 달걀을 하나 성기게 풀었다. 불 끄기 한 3분 전에 냄비 안을 저어 회오리를 만들어 준 다음 성기게 풀어 둔 달걀을 붓고 파도 넣는다. 계란이 살짝 익거든 한번 더 저어주면 속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북엇국이 완성된다. 아, 후추를 먹고 싶은 만큼 뿌려주는 것도.
예전부터 요리는 내게 가장 큰 리추얼이었다. 재료를 고르고 집으로 와서 썰고 다듬어 볶고 끓이고 찌는 동안 익숙한 공간에 맛있는 냄새가 나고 온기나 열기가 돈다. 재료를 튀길 때의 빗소리나 국물 요리가 끓을 때의 보글거림처럼 불규칙하지만 듣기 좋은 소음이 생겨난다.
때론 남이 끓여 준 미역국을 먹고 싶다던 친구를 위해 엄마와의 기억에 의지해 처음 끓여봤던 소고기 미역국처럼 새로운 나만의 레시피가 생기기도 하고, 또 어느 날엔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멋대로 조합해 두 번 다시 못 만들어 낼 맛의 요리를 만들기도 한다.
갓 만든 음식을 식탁에 가지런히 놓고 먹는 것도 키보드를 위로 밀어내고 유튜브를 켜두고 먹는 것도 상관없다. 살아가려면 먹어야 하고 먹는다는 건 삶의 의지를 말하기도 한다.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혹은 소중한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 요리를 하는 동안엔 외롭지 않았다.
자살 고위험군이라는 말을 듣고 돌아온 길에 내가 나에게 차려 준 갓 지어진 따끈한 흑미밥과 부드러운 북엇국. 잘 먹겠습니다. 뽀얀 국물에 풀린 촉촉한 밥알이 목구멍을 타고 배 속까지 따끈하게 데웠다.
서류 속에 미처 다 쓰이지 못한 나라는 사람은 분명 살고 싶어 한다. 죽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렇게 살기 싫다는 말의 서투른 표현일 뿐이라고. 밥을 다 먹고 바로 설거지를 했다. 소근육을 움직이는 일이나 주변 환경의 청결도를 올리는 일은 모두 마음 챙김이 된다.
일과 이상과 무수한 인간관계에 순위가 밀려 가장 뒤에 서 있던 나 자신을 돌보기로 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도 돌볼 수가 있다.
나를 돌보며 먹고사는 일, 시작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