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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아실현 김말이

매슬로우는 말했다.

by 은초록

20대 초반을 조금 넘겼던 그때의 나는 논현동 시장 골목에 살았다. 15분만 이내로 걸으면 교보문고와 강남역에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골목마다 이름도 모르는 외제차가 즐비하고 잘 차려입은 사람들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그곳에서 나는 낯선 서울살이 2년 차의 어리고 가난한 이방인이었다.


알바를 두 개씩 하며 15시간을 집 밖에서 보내고 쪽잠을 자는 생활을 했지만 서울의 물가는 살인적이었고 잠시라도 일을 쉬게 되면 금방 생계는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루 식비를 1000원으로 제한하고 고시텔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밥과 라면, 김치로 끼니를 때우던 때였다.


어느 날은 퇴근길에 시장으로 들어오는데 고소한 기름냄새가 가득했다. 자연스레 눈길이 간 그곳에는 산더미처럼 튀겨서 쌓여있는 튀김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김말이. 튀김 하나의 가격은 500원이었다.


내 하루 식비는 1000원. 김말이는 500원. 가진 돈이 매우 적었지만 500원 정도는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 김말이를 사 먹지 못했다. 내겐 갓 튀겨낸 노릇노릇한 그 김말이가 사치였던 것이다.


살면서 더 가난했던 시간이 없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딱히 큰돈을 벌어본 적은 없지만 착실히 일해서 월수입이 제법 올랐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가끔씩 그때 먹지 못한 김말이 생각이 나곤 한다. 결국 그곳에서 2년을 살다 나올 동안 단 한 번도 먹지 못했던 그 김말이가.



이사를 한 후 식재료를 정리하다가 자른 당면 봉투를 발견했다. 저당질 식이를 하기 전엔 정말 좋아하는 부재료였지만 식단을 바꾸면서 한동안 멀리 했더니 비닐에 먼지가 쌓일 정도로 방치된 자른 당면이 반의 반쯤 남아있었다.


당면 물에 살짝 불렸다가 3분만 삶고 바로 건져서 간장과 설탕을 대신할 대체당, 후추, 다진 대파, 참기름 등을 넣고 무치면 간단한 잡채가 된다. 만들어진 잡채를 적당한 크기로 자른 김밥김에 올려 돌돌 말아 끝 부분을 물로 붙여 놓는다. 반죽은 튀김 가루를 써도 좋고 밀가루에 아주 약간의 조미료로 간을 해도 좋다.


물을 부어 또옥또옥 떨어질 정도의 반죽을 만들어 놓고 계란말이용 작은 팬에 기름을 절반 이하로 부어 온도를 올렸다. 물반죽을 떨어트려 파스스 하게 튀김옷이 기름 위로 떠오르면 말아둔 김말이를 밀가루에 살짝 굴려서 다시 한번 물반죽에 굴려 팬으로 옮겨 튀긴다. 밝은 노란색이 날 때 잠시 꺼냈다가 다시 한번 튀겨주면 노릇한 김말이가 된다.



살다 보면 많은 것이 사치가 된다. 최저의 안전망 없이 지내다 보면 입에 밥이 들어가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방 한 칸에서 잠드는 것도 사치. 일과 집을 반복하다가 잠시 잠깐 웃을 일들도, 어느 날 교통사고처럼 찾아온 사랑에 눈물짓는 것도 사치가 된다.


아파도 쉬어선 안 된다. 몸의 아픔은 조심성이 없는 것이고 마음의 아픔은 의지가 부족한 것이다. 생계를 위한 생산성 있는 일 이외엔 해선 안 돼.


나는 보란 듯이 김말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까슬까슬한 튀김옷은 얇고 파삭했다. 직접 만들어서 넣은 당면소는 내가 좋아하는 맛이 난다. 당면은 적당히 촉촉하고 옅은 간장과 후추의 맛은 근사하다. 비록 김밥용이지만 이 모든 걸 감싼 김에서는 흐릿하게나마 바다의 향이 느껴진다.



한 달 벌어 한 달을 겨우 버텨내는 삶 속에서도 나는 주방 앞에 서서 이렇게 요리를 해왔다. 내 몸을 누일 수 있는 집을 구해 혼자 살았다. 때론 친구들을 만나서 웃기도 하고 소소한 취미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다 모든 세상의 이유가 당신이 되는 사랑도 했었다. 저마다의 어려움과 결핍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대답을 했다. 30대 후반에 뒤늦게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심리 공부를 시작했다.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에서 말한 것처럼 생리적 욕구 > 안전의 욕구 > 애정/소속 욕구 > 존중의 욕구 > 자아실현의 욕구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가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의 김말이는 내게 생리적 욕구가 아닌 자아실현의 욕구의 결과물이다. 비단 식욕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상위차원의 욕구들을 김처럼 감싸며 하나로 융합되는 이미 너무도 잘 아는 맛. 고소하고 노릇노릇한 맛을 가진.


작은 계란말이 팬 가득 튀긴 김말이는 모두 여덟 개. 두 개를 먹었으니 나머지 여섯 개는 소중한 사람과 나눠먹을 생각이다. 떡볶이를 사 와 달라고 연락해야겠다. 오늘을 잘 살아낸 당신과 나를 위로하며.


오늘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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