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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초록 Aug 01. 2023

2. 약 864배 당근라페

그 절의 대웅전에는 우리의 이름이 적힌 연등이 나란히 달려있었다.

한달도 전에 라구 소스를 만드느라 사왔던 흙당근은 상온에 대충 보관했던 탓에 수분이 빠진 건지 쪼글해져 있었다. 버리기엔 아까워서 물에 박박 씻은 다음 양배추 칼로 겉을 깎아내고 채칼이나 식도로 가늘게 채를 친다. 그릇에 담아 소금을 넣고 뒤적뒤적 섞어 절여 둔 뒤에 홀그레인 머스터드, 설탕 대용 대체당, 올리브 오일과 후추 레몬즙을 넣어서 꼬들해진 당근을 무쳤다.


색이 고운 당근라페가 만들어졌다. 샐러드로 먹어도 좋지만 식빵이 있다면 물기를 짜낸 당근라페만 가득 올려줘도 근사한 샌드위치가 된다.



친구가 있었다. 흔한 이야기처럼 우연처럼 필연히 알게 되어 밥 한끼로 시작된 사이였다. 그는 참으로 맥시멀리스트였다. 웃음도 눈물도 욕심도 에너지도 많은 사람. 가끔 그의 외향적임과 진취적임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친구 앞에서는 상대적으로 차분해지곤 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관계가 연애와 비슷하다고 느꼈던 적이 많았다. 1년이 딱 떨어지진 않는 52주라면 연간 20~30회는 친구와 만났다. 대부분 같이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그 순서가 반대가 될 때도 있었다. 가끔씩 전시회나 전혀 안 가본 동네를 가보기도 했지만 집에서 1시간 이상 소요되는 그의 사무실 근처에서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고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비슷한 스케줄이었다. 집에서 2달 이상도 나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집순이인 나는 그만큼이나 그 친구를 좋아했었다.



"108배라도 해볼까봐."


불자 였던 친구가 하루는 짝사랑의 겨움에 속상해하며 저 말을 했을때 무교인 나는 냉큼 가보자고 말했다. MBTI로 보았을 때 드물만큼 희귀하다싶을 만큼 P의 선호도가 높은 나였기에 친구에게 위로가 된다면 절이라도 같이 하고 싶었다.


우리는 함께 친구 동네 언덕배기에 있는 절에 가서 땀을 뻘뻘 흘리며 108배를 했다. 장소에 걸맞지 않게 연애 성취나 취업기원 등의 세속적인 소원을 빌고 108배 이후에는 3배씩 추가해 친구나 가족의 소원도 별도로 더 이루어달라며 부처님께 맡겨놓은 양 절을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경내 벤치에 앉아 땀이 식을때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비주기적으로 야 절하러 갈래? 하면 헉헉 대며 같이 언덕배기를 오르고 108+@배를 끝내고 작게나마 현금을 공양한 후, 후덜거리는 다리로 내려와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게 루틴이었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동안 서로가 마음 속으로 빌었던 세속적인 소원들을 공유하고 깨달은 것들을 이야기 하곤 했다.



한번은 친구를 서운하게 만든 것 같아서 집에 가는 길에 흙당근을 세개나 사서 처음으로 당근 라페를 만들었었다. 이전에 손님에게 선물 받았다며 기쁜 얼굴로 내게 꿀을 올린 그릭 요거트와 빵과 곁들여서 아껴 먹었던 당근 라페가 생각나서.


열탕소독한 큰 잼 병에 라페를 가득 담아 1시간 거리를 달려 외근 중인 친구의 사무실 문고리에 당근라페가 든 종이가방을 두고 왔었다. 그 날 저녁 친구는 왜 와서 그냥 갔냐며 서운해하고 나의 진심이 가득하고도 다분히 계산적인 사과는 성공했었다.



랩 위에 살짝 겉면을 구운 통밀식빵을 올리고 물기를 잡아 줄 버터를 약간 바른다. 씻어서 잘 털어낸 파란잎 채소에 달걀 후라이, 얇게 썰어 구운 스팸을 두조각 올리고 당근 라페를 산더미처럼 올려서 빵을 닫는다. 랩으로 꾹꾹 눌러 감싼 다음 반으로 가르면 문자 그대로 터질듯한 당근라페 샌드위치.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샌드위치를 먹어본다. 통밀빵의 투박한 향 너머로 수분이 많이 빠져 꼬독꼬독한 당근 라페는 특유의 달달함이 있다. 머스터드의 향과 레몬즙의 산미는 채소와 더해져 산뜻한 맛이 난다. 와중에 단백질 핑계를 대며 넣은 달걀 후라이와 노릇하게 잘 구워진 스팸의 기름진 맛은 든든하다. 크게 베어물면 이 모든 맛이 조화롭게 섞인다.



결론을 말하자면 친구가 '있었다.'


너무 가까웠던 탓에 서로의 오해와 실망으로 우리는 결별했다. 연애를 하다 헤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남이 되듯, 8번이나 108배를 함께 했던 우리는 너무 가까웠던 탓에 영영 멀어져버렸다. 나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을 정도였던 그 사이는 과거가 되었다.


계절이 다섯번이나 지난 지금, 친구였던 그를 추억하는 건 몇년 만에 만들어 본 당근라페 때문 만은 아니겠지. 늘 나의 어려움에 대신 울어주던, 좋은 일엔 나보다 기뻐해주던 곱씹으면 톡 하고 터져 나오는 달큰하고 알싸한 홀그레인 머스터드 같은 기억들 때문일거라고.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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