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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LAXY IN EUROPE Jan 13. 2024

다시 짐을 싸며 느끼는 소회

출발부터 비행, 파리 도착까지

내일이면 프랑스에, 다음 주면 스페인에 있을 거라는 사실이 정말 조금도 실감이 나지 않는 저녁입니다. 여행 떠나기 전 한국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위해 엄마가 요리를 하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오네요. 떠나기 전 하루는 짐 싸기와 여기저기 아픈 몸을 수리하느라 내과, 약국, 체형교정원을 다니며 보냈고, 가방 한 켠을 각종 처방약들 - 두통약, 혈압약, 수면유도제 - 과 함께 프로바이오틱스와 루테인 지아잔틴에 콤부차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런, 유럽 여행의 낭만은 어디로 가버린 거죠?


Galaxy in Europe : 나는 왜 떠나는가?

한 달 또는 두 달에서 세 달까지 이어지는 제 유럽살이는 사람들이 보통 꿈꾸는 로망, 낭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회색 콘크리트 벽을 마주한 듯한 실존(實存)에 가깝다고 할까요? 눈앞에 마주한 회색 벽의 존재감은 어떤 것보다 강렬하지만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회색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도 잊혀집니다. 찰나일 수도 무한일 수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만이 머리를 감싸고 있고, 그래서 떠납니다.

Galaxy는 은하계, 즉 우주를 뜻하는 단어이자 제 영문이름인데요. 'Galaxy in Europe'은 '유럽에 있는 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럽에서 만나는 우주, 새로운 세상'을 의미합니다. 내가 태어나 오래 살아온 곳에서는 바뀌고 싶어도 살던 대로 살기가 쉬운 것 같아요. 늘 가던 곳을 가고, 늘 보던 것을 보고, 늘 만나던 사람을 만나고, 늘 먹던 음식을 먹고 말이죠. 아인슈타인이 "똑같은 일을 계속하면서 결과가 바뀌길 바라는 건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생활습관을 만들다 보면 아무래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마주하게 되는데요. 그 새로운 시각으로 나를 들여다보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답이 나올 때도 있더라고요.


지금 시각 오전 5시 50분 공항입니다. 짐을 다 꾸렸지만 결국 글은 마무리하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머릿속에 생각은 한가득인데 이를 풀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캐리어의 지퍼를 잠그고, 택시에 짐을 싣고 몸을 싣고, 아직은 어두운 길을 달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택시 안에서도 설레는 마음에 들떴다가, 여권? 지갑? 하며 놀래서 한 번 챙겼다가, 국제 운전면허증은 발급했지만, 결국 운전할 때 필요한 안경은 차 안에 두고 왔구나 하며 내렸습니다. 40분 남짓한 시간 동안 글을 어떻게 써야지 하는 영감도 받았던 것 같은데 체크인을 하고 글을 쓰려고 벤치에 자리 잡은 지금은 발포성 비타민을 물에 녹인 것처럼 다 녹아 사라져 버렸네요. 이럴 땐 지나간 영감에 미련두지 말고 깔끔하게 다음으로 넘어가는 게 글에도 정신건강에도 좋습니다. 비록 마음 한 구석에 기억이 떠오르기만 하면 아주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더라도 말이죠.


지금, 여기, 파리(Paris)

현재 시각 6:35 am. 시차 때문에 눈이 빨리 떠졌습니다. 잠결에 눈을 떴다가 낯선 방안 풍경에 놀라 깼다는 편이 더 맞겠네요. 이렇게 방 하나의 낯설음만으로도 변화가 가지는 힘은 큽니다. 살갗에 닿는 이불의 촉감, 조명의 밝기, 창문이나 거울의 위치 같이 어찌 보면 사소한 것들도 내 신체와 뇌는 큰 자극을 느끼는데요. 어제 짐을 내려놓자마자 카페로 향하는 길에서 들려오는 행인들의 대화와 프랑스어로 적힌 간판들, 화려한 크리스마스 불빛들(파리 거리들에서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1월까지는 흔히 볼 수 있다고 해요.)도

아, 내가 지금, 여기(NOW, HERE) 있구나!

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처음 공항에 내렸을 때만 해도 월요일이면 출근해야 할 것 같고, 늘 하던 루틴에서 멀리 떨어져 나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말이죠. 이 강렬한 느낌이 중요한 것은 루틴에 익숙한 삶을 살다 보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기 때문인데요. 즉, 분명 어딘가에 있고, 어딘가로 가고 있지만,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GOING NOWHERE) 있는 겁니다. 이 감각을 일깨우는 방법은 바로 ‘NOWHERE’를 알아차리는 겁니다.


물론 낯섦이 주는 불안, 스트레스도 있습니다. 그래서 낯선 공간에서 겪을 수 있는 불편함을 최소화하려고 짐을 싸면서부터 만반의 준비를 하는데요. 어떤 준비물보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동행(a company)입니다. 이번 여행에는 독서모임으로 만난 친구와 동행을 했는데요. 새벽부터 공항에서 만나 상하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바꿔 타고 12시간을 나란히 앉아 오면서 너무 든든하고,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잘 먹고, 잘 자며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녀 덕분이 아니었나 싶어요.

인천공항 출발 직전 나를 찍어준, 사랑스러운 동행인

그리고 도착한 파리 에어비앤비. 이미 체크인을 대신해주고, 제법 복잡한 파리 아파트의 출입문 여는 방법까지 파악해 주고, 추울까 봐 방이며 거실, 화장실 라디에이터까지 미리 다 켜둔 또 다른 친구가 있었기에 낯선 공간에서 안락함을 느꼈습니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카페로 향해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나니 파리 꼬흐브부와(Courbevoie)가 지구 반대편의 우리 동네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낯설고 불안한 게 아니라
낯섦이 편안한 경험이 되는 마법

이것이 내가 유럽살이를 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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