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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LAXY IN EUROPE Jan 29. 2024

파리에서의 3일(le 3 jours à Paris)

파리와 상관없이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들

첫째 날 Le Premier Jour

파리에서의 첫째 날은 추웠습니다. 무작정 떠나오면서 비행기에서 내리면 푸른 하늘과 따뜻한 공기가 나를 맞이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아래위로 한 겹씩 더 껴입고 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약간의 배신감까지 느꼈습니다. 날씨에게, 도시에게서 배신감을 느끼다니, 나는 완벽한 F(feeling)이라는 생각이 들어 슬며시 웃음이 나더군요. 어쨌든 따뜻하게 차려입고, 핫팩까지 소중히 주머니에 챙기고는 길을 나섰습니다.


첫 목적지는 토요일마다 서는 로컬마켓이었는데요. 어느 나라를 가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장은 활기가 있습니다. 각종 식재료들과 과일, 조리된 요리나 부식류는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죠. 특히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서 파리 로컬 마켓이라니 제 눈은 말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만약 장을 보러 간 거였더라면 로스트 치킨부터 다양한 치즈가 들어간 요리, 과일과 채소까지 왕창 샀을 거예요. 가격도 마트보다 저렴하고 품질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다음 일정이 있기 때문에 눈호강 하는 것만으로 참았습니다.

파리 라데팡스 근처 로컬 마켓

저는 쇼핑은 싫어하지만 장보기는 좋아합니다. 옷, 신발을 사는 것에는 최소한의 시간을 들이지만, 장을 볼 때는 어떤 요리를 할지 고민하고, 처음 보는 식료품들을 감상하는데 정성을 들입니다. 새로운 동네로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 중에 하나가 슈퍼마켓을 가보는 것일 만큼 우선순위가 높은데요. 마켓에 들어선 저의 표정을 본 친구가 진지하고 행복해 보인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어요.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행복했습니다. 제게는 유럽의 로컬 마켓이 샹젤리제 거리의 명품, 패션샵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놀이터입니다.  

세상 진지한 눈빛과 집중해 내민 입술

오후에는 일행 중 한 명의 수영복을 사러 백화점을 가게 됐는데요. 겨울 시즌이라 크게 할인을 하는데도 저는 그저 빨리 사고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더라고요. 그런데 다른 일행들은 여기저기 돌아보고 옷감도 만져보며 그 공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나와 같지 않다는 사실이 강하게 와닿았어요. 불이 뜨겁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불에 데었을 때 그 아픔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둘째 날 Le Deuxième Jour

여전히 추웠던 날. 어제 열심히 돌아다닌 탓에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도 너무 좋았어요. 아침에 바로 사 온 빵과 크로와상, 계란 프라이와 과일,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파리지엔느가 하루를 시작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아무 근거 없는 생각을 해보면서 말이죠. 둘이서 시작한 아침 만찬은, 1시간 여만에 나타난 다른 한 명이 다시 아침 식사를 시작하면서 점심 식사로까지 연결이 되었어요. 한국에서 대부분의 식사는 밥을 먹기 위한 시간인데 유럽에서의 식사는 함께 즐기는 - 음식뿐만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 시간이어서 길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빈 곳이 따뜻하게 채워지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해요.

파리에서의 길었던 조식

식사 후에는 파리의 상징, 에펠탑(La Tour Eiffel)을 보러 나섰습니다. 사실 첫째 날 저녁 에펠탑 야경을 눈 시리도록 봤지만 오늘 파리에 도착한 일행을 위해 그곳으로 향했는데요. 솔직히 말하면 또? 왜? 하는 질문이 마음속에 들었어요. 안 가본 곳을 가고 싶은 마음도 있고,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하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하지만 함께 한 시간은 아주 좋았어요. 여섯 명이 둘셋씩 나눠 이야기하고, 사진도 찍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참 의미 있는 행위인 것 같아요. "너, 나의 동료가 돼라."라고 말한다고 동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보낸 시간과 나눈 이야기가 쌓이고 쌓여 가까워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La Tour Eiffel

셋째 날 Le Troisième Jour

쏜살 같이 지나간 파리에서의 2일을 뒤로하고 스페인 말라가로 출발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짧은 시간이었기에 아쉽기도 했지만, 영하로 떨어진 추운 날씨 탓에 어서 빨리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고 싶었어요. 우버에 가방과 몸을 싣고 출발하면서 문득 여행은 목적지(WHAT)가 아니라 결국 나, '내 마음먹기'에 달린 것(HOW)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무슨 생뚱맞은 의식의 흐름인지를 정리하자면요.


파리에서 에펠탑(WHAT)를 두 번이나 보러 갔다고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파리에 가봐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은데, 똑같은 곳을 두 번이나 갔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제게는 생각지도 못한 관계의 누적을 느끼게 해 준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아침부터 점심까지 이어진, 바게트, 크로와상, 계란 프라이와 과일로 된 식사는 누군가에게 '파리 맛집 투어'를 포기한 어리석은 선택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게는 음식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빈 속을 채우는 방법을 알게 된 따뜻한 경험이었지요. 내가 무엇을 하고, 먹고, 보느냐에 집중한다면, 그것을 못 하고, 못 먹고, 못 했을 때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무엇을 하든 나 스스로에게서 그 이유를 찾는다면, 절대 실패할 수 없겠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파리를 떠나온 지도 열흘 남짓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글을 마무리하게 되네요.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좀 더 내 마음에 집중하려고 해요. 이곳 말라가에서도 내가 따뜻한 햇살과 파란 하늘, 푸른 바다에만 집중한다면 오늘 같이 흐린 날은 완벽하지 못한 날이 될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 이 글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 또한 의미 있는 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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