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영 셸던(Young Sheldon) 시즌7 13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 아니라, 관성의 동물이다.
후회를 하면서도 우리는 그 후회할 짓을 또 반복한다.
실수로부터 배운다는 말은 어쩌면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달콤한 희망 사항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배운 대로 살기보다 살던 대로 산다. 머리로는 수백 번도 더 다짐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오는 것은 학습된 지성이 아니라 몸에 밴 습관이다.
얼마 전 드라마 <영 셸던(Young Sheldon)>의 마지막 시즌을 보며 나는 이 서늘한 진실을 다시금 마주했다.
평생을 이성과 논리로 살아온 천재 소년 셸던 쿠퍼. 그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답을 찾지 못해 헤맨다. 그는 상상 속에서 아빠와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수많은 '만약에(What if)'를 그려본다. 아빠의 출근길, 제대로 된 '굿바이'를 나눴다면, 스타트랙 명대사를 주고받았다면, '사랑한다'고 말했다면... 그리고는 장례식 당일 단상 위에 올라가 자신이 아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빠도 아셨으면 한다고 솔직한 추도사로 고백하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현실의 셸던은 그러지 못한다. 단상에 오르기는커녕, 관에 누운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건네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십 번도 더 작별 인사를 마쳤지만, 현실의 입은 굳게 닫혀 있다. 그것은 슬픔 때문이기도 하지만, 늘 감정 표현을 유보해 왔던 그의 관성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셸던답게' 망설였고, 결국 침묵을 택했다.
지나고 나서야 "그때 말했어야 했는데"라고 곱씹는 셸던이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아렸다. 비극적인 상황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보여준 태도가 나의 일상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늘 '할까 말까 할 때는 하지 않는 편'을 택해왔다. 낯선 모임에서 새로운 사람에게 말을 걸어볼까 싶다가도 "굳이?"라며 입을 다물었고, 회의 시간에 좋은 의견이 떠올라도 "나서지 말자"며 손을 내렸다. 누군가에게 고마움이나 미안함을 느꼈던 찰나에도 "다음에 기회 되면 말하지 뭐"라며 타이밍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삼켜버린 말과 행동들은 안전하다. 적어도 당장은 쑥스럽지 않고, 거절당할 위험도 없으며, 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전함의 대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이다.
셸던은 아버지가 떠난 뒤 그날 아침의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한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상상 속의 그는 아빠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지만, 현실의 그는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한 아쉬움만 남았다.
나의 망설임도 마찬가지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한 나는 누구보다 사교적이고, 내 의견을 당당히 말하며, 제때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관성에 떠밀려 오늘도 입을 다문다. "다음에 하면 되지",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이렇게 우리는 늘 삶이 영원히 이어질 시즌제 드라마인 것처럼 행동한다. 오늘 하지 못한 말은 다음 화에 하면 되고, 오늘 놓친 기회는 다음 시즌에 잡으면 된다고 막연히 믿는다. 그러나 현실의 엔딩은 예고편 없이 들이닥친다. 셸던의 아버지가 떠나던 날 아침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지극히 평범한 날이었다. 특별한 징조도 배경음악도 없이 삶의 한 챕터가 셔터를 내리는 순간, 남겨진 사람들은 그제야 깨닫는다. '다음'이라는 기약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이었는지를.
드라마를 다 보고 난 뒤, 나는 셸던이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그 추도사를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만약 관성을 깨고 단상에 올라갔더라면, 비록 힘들어도 진심을 내뱉었더라면, 그의 슬픔은 조금 다른 모양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다짐해 본다. 상상 속에서만 근사한 사람이 되지 말자고. 머릿속으로 백 번 시뮬레이션하는 것보다, 현실에서 한 번 저지르는 실수가 낫다고. 즉,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하는 쪽을 택하기로 한다. 쭈뼛거리더라도 먼저 인사를 건네고, 얼굴이 붉어지더라도 손을 들어 의견을 말하고, 뜬금없더라도 소중한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게 바로 삶이다. 삶은 리허설이 없다. 엔딩 크레딧은 언제 올라갈지 모른다. 그러니 관성에 떠밀려 오늘을 그저 흘려보내지 말자. 훗날 "그때 그 말을 했더라면"이라고 후회하는 상상 속의 주인공이 되는 대신, 서툴더라도 오늘 나의 목소리를 내는 현실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다. 그것이 셸던의 침묵이 내게 남긴 뼈아픈 조언이다.
[ 표지 사진: Unsplash의 Daniel Ola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