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고 과정을 즐기는 행위, 독서
하늘이 맑고 푸르디푸른 시월의 어느 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권 분량을 끝냈다. 많은 이들이 어렵다고 말한 것을 듣고 집중한 덕분인지 생각보다는 스르륵 잘 읽혀 넘어갔지만 문제는 그래서 리뷰를 어떻게 쓸 것인가?
그 어렵다는 책을 한 번, 그것도 1권만 읽고 나서 이제 겨우 등장인물들의 이름 정도 기억하는 수준에서 책 리뷰를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싶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 이반은 잠꼬대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이젠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아. 무언가를 이해하려 들면 곧 사실을 왜곡하게 되거든. 그래서 나는 사실에만 머물기로 결심한 거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이 말이 내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나의 이해가 사실을 왜곡시키지 않을까, 즉 틀린 게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져들었고, 이와 동시에 책 리뷰도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때 나를 구원해준 것은 바로 또 다른 책이었다.
“의무감으로 책을 읽지 않았네. 재미없는 데는 뛰어넘고, 눈에 띄고 재미있는 곳만 찾아 읽지. 나비가 꿀을 딸 때처럼. 나비는 이 꽃 저 꽃 가서 따지. 1번 2번 순서대로 돌지 않아. 목장에서 소가 풀 뜯는 걸 봐도 여기저기 드문드문 뜯어. 풀 난 순서대로 가지런히 뜯어먹지 않는다고. 그런데 책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
그 책이 법전인가? 원자 주기율 외울 일 있나? 재미없으면 던져버려. 반대로 재미있는 책은 닳도록 읽고 또 읽어. 그 기나긴 <카라마 조프의 형제들>도 나는 세 번을 읽었어. 의무적으로 읽지 않는다는 말이네. 사람들도 친구 사귈 때, 이 사람 저 사람 두루 사귀잖아. 오랜 친구라고 그 사람의 풀스토리를 다 알겠나? 공유한 시절만 아는 거지. 평생 함께 산 아내도 모르는데(웃음).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도 모르는 거야. (이하 생략)
김지수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의무감으로 읽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와 맞닿아 있다. 나비가 날아다니듯 카르마조프를 읽으며 다양한 꽃에서 나는 서로 다른 향기를 즐기듯 등장인물과 사건의 맛을 봐야지. 물고 뜯고 씹고 맛보다 보면 혀 끝에 닿는 강렬한 첫맛과 꼭꼭 씹어 느끼는 깊은 맛까지 알게 될지 모르겠다.
처음에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비롯해 그의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물론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 조시마 장로를 제외하고 - 욕심이 넘치고 이기적이고, 과격하며,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 이상한 사람들로 느껴졌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그들의 욕망과 이성, 현실적 한계의 부딪힘이 그들을 고뇌할 수밖에 없게 한다는 사실에 공감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이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고, 그렇게 큰 소리로 세상이 다 들리도록 말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이 나 자신보다 훨씬 용기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5부 찬반론까지 읽었으니 아직 아버지 표도르는 살아 있고, 이반이 떠난 후 혼자서 지내는 본채의 밤이 깊어가는 중이다. 알렉세이는 장로의 임종을 지키러 수도원으로 돌아갔고, 이반은 아버지 표도르에게 위험이 닥칠 수 있음을 스마르댜코프에게 들었지만 서둘러 모스크바로 떠나버렸다. 때마침 스마르댜코프는 간질 발작으로, 그레고리는 지병인 허리 통증으로 드러누웠고, 드미트리가 언제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밤인데도 표도르는 그루센카가 찾아오기로 약속을 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기다리고 있다. 모든 등장인물의 다음 액션은 상상도 가지 않고, 그래서 더욱 다음 내용이 궁금해진다. 카라마조프가의 모든 사람들과 그루센카, 카테리나, 조시마 장로 각자의 이야기들까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 이들 모두가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사실감마저 느껴졌다.
예수가 다시 돌아와 기적을 행하지만 예수임을 부정당하고 대심문관에 의해 감옥에 갇힌다. 감옥을 찾아온 대심문관과 예수의 대화(예수는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는 이반이 동생 알료샤(알렉세이)에게 들려주는 극시이다. 소설 속에 또 다른 이야기를 담았다는 것 자체가 매력적이고,
예수의 기적과 진리의 종교인 기독교를 그렇지 않다고 교단의 핵심인사인 대심문관의 입에서 듣는 것도 무척 새로웠다. 이 부분만 따로 정리해서 내용을 좀 더 이해하고 싶다.
어떻게 쓰지? 하는 질문과 걱정으로 시작했는데, 책을 읽으며 재미있었던 포인트들로 짚어나가다 보니 글이 되었다. 아무리 어려운 책도 일단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즐기면 그뿐이다. 시작과 과정을 즐기는 행위가 독서일 뿐 정답을 맞히거나 새로운 해석 방향을 제시하는 결과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마지막으로 어렵다고 지레 겁먹고 시작하지도 않으려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일단 시작하게 해 준, 그리고 함께 즐기게 해 준 고전 살롱 멤버들과 운영자 란주님께 이 영광을 돌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