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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LAXY IN EUROPE Nov 05. 2022

폭력을 겪는 인간에 가져보는 작은 희망

드라마 [D.P.]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해석

3줄 정리

폭력을 행하거나 당하거나 방관할수록
인간은 이에 익숙해지고 점점 파괴되어가지만
폭력에 물들지 않으려는 인간의 저항은 계속된다.


[D.P.]가 처음 공개되고 많이 회자되었을 때는 솔직히 크게 관심이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군대 이야기는 술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깃거리였고, 영화나 드라마 속 빠지지 않는 이별의 소잿거리였기에. 가 본 적도 없는 곳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고 보는 것에 대해 감흥이 점점 사라졌다고 할까? 그래서 그저 좋아하는 배우의 얼굴을 보고자 느지막이 재생 버튼을 눌렀을 땐 또 하나의 '군대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D.P.] 포스터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D.P.]는 군대 이야기가 아니라 폭력 앞에 선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폭력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여러 선택들과 그에 따른 결과들을 담고 있다. 단순히 폭력이 폭력을 낳는다는, 폭력의 대물림과 같은 결정론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들의 승리와 패배를 보여주며, 폭력에 물들었다가도 달라질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스토리의 결말과 무관하게 희망적인 이야기이다.


!! 스포일러 얼럿!! 아직 [D.P.]를 보지 않으셨다면, 이후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폭력으로 점철된 세상

드라마는 안준호(정해인 )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배달 알바를 하던 준호는 거스름돈을 삥땅 쳤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다. 실제로 피자를 받으러 나온 그 집 아이가 거스름돈을 챙긴 것인데 당연히 아르바이트생 짓이라 여긴 고객이 항의 전화를 했고, 아르바이트비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던 사장은 이때다 싶어 준호를 해고한 것. 돈을 받지 못한 준호는 배달용 스쿠터를 타고 나와 팔아서 돈을 챙긴 다음 그 길로 입대를 한다.

안준호 이병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황장수 병장

어린 시절부터 준호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맞는 엄마를 보며 자랐다. 복싱을 배워 아버지에 맞설 힘은 키웠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도둑 취급에 부당해고까지 사회적인 폭력에 맞서기에도 그는 아직 어리고 힘이 없는데, 군대라는 또 다른 폭력 세상으로 떨어지게 된다.


력에 순응하는 사람들

황장수(신승호 役)로 대표되는 군대 내의 폭력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곤충을 잡아 찢고, 우르르 떼로 몰려다니다 길에서 만난 강아지에게 돌을 던지며, 불리한 상황이 되면 거짓말부터 하는 순진한 듯 간교한 아이들의 폭력성과 닮아 있다. 장난 한 번 친 거니까, 우리 사이니까, 다 같이 한 거니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용서를 강요한다.


내게 압권이었던 부분은 자신이 괴롭혔던 조석봉 일병(조현철 役)이 도대체 왜 그렇게 했는지를 물었을 때 "그냥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었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다. 그럴 수 있으니까 그래도 된다. 습관처럼 저지르다 보니 죄의식도 미안함도 없다. 아침이니까 잠을 깨고,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는 것과 같다.

폭력을 시전 하는 병장 황장수 vs. 폭력을 수용하는 민간인 황장수

아이러니한 것은 '그래도 된다'는 논리가 황장수 자신에게도 역으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제대 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황장수는 점주의 폭언과 비하 발언에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에서 자신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폭력에의 순응이 아닐까? 황장수는 스스로 폭력을 행함으로써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므로 자신이 다시 폭행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조석봉의 탈영 때 흠씬 두들겨 맞고 입원한 선임 병사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마치 자신이 맞았기 때문에 때릴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기라도 한 것처럼.


폭력에의 방관

때리고 맞는 사람이 있으면 주변에는 늘 이를 지켜보는 제삼자들이 있다. 이들은 말리는 사람 또는 말리는 척만 하는 사람이거나 부추기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들로 나뉠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하는 사람의 고통보다 자신의 안위에 관심이 있고, 자신이 나서도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박범구 중사(김성균 役)나 한호열 병장(구교환 役)은 부대 내 폭력 상황을 알고 있었고, 조석봉 일병을 보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 D.P.로 발탁돼 외부로 다니기 시작한 준호도 후임인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결국 내무반에서 혼자 갖은 고초를 겪게 된 조석봉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조석봉이 자신의 처지를 더욱 비관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다.

도움이 되려 하지만 도움이 되지 못했던, 그들만의 정의에 머물렀던 D.P.조

하지만 방관은 폭력을 행하는 것만큼 나쁘니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은 하나마나한 말이다. 그걸 몰라서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못 본 척, 안 들리는 척 지나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폭력에 관여하게 되면 책임의 문제가 따르고, 잘잘못을 따지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오히려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 한 번 말렸다고 해서 다시 발생하지 말란 법이 있는 것도 아니며, 한 곳에서의 폭력이 멈췄다고 해도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폭력들 앞에서는 새발의 피다. 제삼자의 방관과 폭력의 방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억눌린 감정의 표출 = 폭력

계속 이어지는 폭력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변화할까? 폭력을 행하는 이들은 점점 더 악랄하고 자극적인 방법을 탐하고, 폭력을 지속적으로 당하는 이는 참고 또 참으면서 끝나지 않을 듯한 수렁에 빠진다. 시간은 흘러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고 깊어간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 심각성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듯하다, 본인마저도.  


조석봉은 결코 처음부터 나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어려서 유도로 전국 체전 금메달을 노릴 정도였고 특전사에 올 정도로 정신적, 육체적 강인함을 갖췄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일본 애니를 좋아하고, 남을 공격하길 싫어하는 그의 성향 때문에 황장수와 그 패거리들의 타겟이 된다. 그렇게 이유 없이 폭력에 시달리면서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공격적으로 변해간다. 휴가 중에 길에서 부딪힌 사람에게 바로 사과를 하는 조석봉이지만, 그 상대가 시비를 걸어오자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소리를 질러 위협하는 모습은 그의 억눌린 감정을 그 자신도 통제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미안하다고 하십시오." - 제대하는 황장수의 팔을 붙잡는 조석봉

결국 그는 폭발한다. 사과를 요구하는 자신에 대한 비웃음에 탈영을 결심하고, 너만 억울할 뿐이라는 박중사의 훈계에 분노해 다시 도주한다. 참을 만큼 참았는데, 더욱 참기만을 강요하고 자신의 인내는 별 것 아닌 양 치부되는 세상에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뿐인 듯하다. 이러한 극단적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자기 파괴로 이어지지만, 다른 선택지는 보이지 않는다.


작은 희망

여기까지 보는데 울기도 많이 울었다. 여기까지 글을 쓰는 것도 힘들었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여기까지 읽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이렇게 극에 치달은 '폭력'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보신 분들은 예상하셨다시피 갑자기 모두 반성하고 해피엔딩이 되기에는 너무 많이 왔다. 하지만 드라마의 끝이 비극이었다고 해서 삶의 끝도 비극인 건가?


인간은 불멸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이며,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중에서


얼마 전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강연에서 들은 인용문이다. 인간이 악에 적응하면, 인간은 악이 된다.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이므로 악인 인간은 다시 선에 익숙해질 수 있다. 따라서 '악'이라고 포기하지도 '선'이라고 안심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인간이 불멸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조석봉은 한호열의 바뀔 수 있다는 설득에 "수통도 안 바뀌는데..."라며 자조적인 말을 내뱉지만, 동시에 "뭐라도 바꾸려면, 뭐라도 해야지." 라고,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변화에 대한 작은 희망을 내비친다. 폭력을 행하거나 당하거나 방관한 적이 있는 모든 이들, 즉 우리 모두는 자조적이지만 동시에 희망적이다. [D.P.]를 만든 이들도 이런 마음으로 뭐라도 하려고 시리즈를 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은 악에 적응하기도 하지만,  다시 다른 곳을 볼 수 있는, 불멸의 존재다.

드라마를 보면서는 현실인 듯 감정이입을 많이 하였다. 실제로 저런 일들이 일어났고,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그러면서 요즘 군대는 많이 좋아졌단 말을 듣고 안심하고 동시에 머쓱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어느 특정 집단의 폭력에 집중하기보다는 인간의 폭력성과 사회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좀 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나와 우리 모두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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