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김지수, 이어령 - 두 번째
인북 소울살롱의 2023년 첫 번째 책으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한 번 읽었으니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으로 책장을 넘겼습니다. '맞아, 이런 말씀을 하셨지.', '역시 세상을 꿰뚫어 보시는구나.', ‘나도 이런 생각을 한 적 있는데...' 하고 계속 감동하면서요. 하지만 리뷰를 쓰려고 보니 그분의 생각을 모두 담기에는 내 그릇이 작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답답한 마음에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 펼친 페이지에서 선생님이 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네요.
"만원버스를 생각해보게. 사람이 꽉 차서 빈 데가 하나도 없는 게 바로 영혼 없는 육체라네. 유명한 일화가 있어. 스님을 찾아온 사람이 입으로는 ‘한 수 배우고 싶다’고 하고는 한참을 제 얘기만 쏟아냈지. 듣고 있던 스님이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들이붓는 거야. 화들짝 놀라 ‘스님, 차가 넘칩니다’ 했더니 스님이 그랬어. ‘맞네. 자네가 비우지 못하니 찻물이 넘치지. 나보고 인생을 가르쳐달라고? 비워야 가르쳐주지. 네가 차 있어서 말이 들어가질 못해.’ 마음을 비워야 영혼이 들어갈 수 있다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김지수,이어령 저) - 마인드를 비워야 영혼이 들어간다
그릇이 작은 게 아니라 비워져 있지 않아서 더 담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더 나아가서 비어 있으면 우주까지 담을 수 있습니다.
컵은 담기 위해 존재하지만,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한다라니. 이 얼마나 큰 역설입니까? 나는 담기 위해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비어 있을 때 우주를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나의 역할(=담다)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나의 본질(=빈 컵)을 인지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요.
유럽에 오기 전 '나는 왜 유럽에 가는 걸까?' 고민했습니다. '원하는 곳에 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야.' 라고 자신 있게 외치며 떠나왔는데요. 과연 이곳에서의 제 삶은 어땠을까요? 무엇보다 이곳의 풍경과 사람들, 음식과 언어, 문화 등을 담기에 바빴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생각과 마음들을 비우지는 않은 채 계속 담았더니 제 컵은 금방 가득 찼습니다.
그렇게 가득 찬 컵은 금방 뜨거워졌다가 다시 금방 차가워졌습니다. 이곳 남부 스페인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일희일비하고, 먼 한국에서 전해오는 소식에도 빠르게 반응하면서 피곤해졌습니다. 나는 이곳에 있지만 한국에도 있고, 즐겁지만 동시에 화가 난 듯도 했습니다. 느리게 살고 싶지만 리모트 워크도 잘해야 하고, 이곳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싶지만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도 끈을 놓고 싶지 않았지요.
영혼을 찾아 먼 곳으로 떠나온 줄 알았는데, 마인드로 가득 차서 영혼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 보였습니다. 어찌 보면 나를 증명하고, 내 여정을 인정받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채웠습니다.
"재미있지. 배꼽을 만져보게. 몸의 중심에 있어. 그런데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중략)... 혹 배꼽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누워서 몸 위에 찻잔을 놓아보게. 어디에 놓을 텐가? 이마? 코? 아냐. 배꼽밖에는 없어.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네. 생명의 중심은 비어 있지. 다른 기관들은 바쁘게 일하지만 오직 배꼽만이 태연하게 비어 있어. 비어서 웃고 있지.”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김지수,이어령 저) -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
나는 배꼽이 되고 싶었던 듯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어떤 기관들보다 더 바쁘게 일하며 웃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채우기보다 비우기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몸에 힘을 빼고, 지금 이 순간의 나, 우주에 닿아 있는 나의 영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미 다른 글에서 "목표를 향해 노를 저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분 좋게 물 위에 떠서 부유하는 게 좋습니다."라고 썼던 걸 보면 나의 영혼은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