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정이(JUNG-E)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故강수연 배우의 연기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명성은 어릴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지만,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고,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작들이 제게는 '옛날 영화'라는 인식이 생겨 보지 않았었거든요. 옛날 한국 영화 특유의 대사 처리랄까, 배우들의 억양이나 발음이 어색하게 들리기도 하고, 극의 전개가 요즘 영화처럼 빠르지 않아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제가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정이> 속 강수연 배우는 차분하면서도 존재감이 확실한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수용과 체념 사이에 있다고 할까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 속에서 느껴지는 떨리는 눈빛과 절제되고 차분한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에서 주인공 '윤서현'의 삶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배우 '강수연'만의 '윤서현'이 창조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부터는 스토리를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갓 나온 신작인 만큼, 아직 안 보신 분들은 더 읽기 전에 영화를 보시거나,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그만 읽으시길 권해드려요.
아이가 아파서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 아이를 위해서 초인간적인 힘을 발현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어쩌면 뻔한 클리셰(cliché)로 여러 곳에서 많이 사용되었죠. <정이> 속 전설의 용병 윤정이(김현주 役)도 마찬가지입니다. 폐병에 걸린 딸의 수술과 치료를 위해 용병으로 뛰어들죠. 그리고 식물인간이 되어서도 뇌가 복제 당해 전투 A.I. 개발을 위해 쓰이게 되는데요. 윤정이의 모친은 손녀딸의 치료와 양육을 위해 무한 뇌 복제에 동의하고, 어린 윤서현은 어떠한 판단도 하지 못한 채 '전쟁 영웅'인 엄마 인형을 받아 듭니다.
어린 윤서현이 자라 엄마의 뇌를 복제한 전투 A.I. 개발 팀장으로 일한다는 것 또한 비극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흔한 설정이란 생각이 들어 어떻게 하면 이 영화가 뻔하지 않게 끝날 수 있을까를 궁금해하며, 아니 뻔하지 않게 끝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계속 봤습니다.
스토리의 결말은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전투 A.I. 개발 프로젝트가 종료되기 직전 윤서현의 도움으로 전투 A.I. 정이는 탈출을 합니다. 이를 방해하려는 세력과의 격렬한 전투,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악역, 중간에 다치게 되는 조력자(윤서현)까지 뻔하지 않았다고 말하기에는 특별한 전개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 뇌리에 박혔던 윤서현 팀장의 대사가 있는데요.
딸에 대한 기억은 다 지웠어
이제 윤정이 팀장은 자유야
윤서현 팀장의 단호한 외침과 상황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A.I.의 표정을 보며 이 순간은 딸 윤서현이 자신의 엄마를 지키려는 엄마이고, 엄마 윤정이가 딸의 보호를 받는 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을 위해 무한 뇌복제로 인간이 아닌 한 기업의 상품이 되어버린 엄마는 그곳에서 벗어날 힘이 없는 상태이고, A.I. 개발 팀장이 된 딸은 엄마를 구할 힘이 있게 자라났으니까요.
윤서현이 A.I.의 탈출을 돕고 엄마의 뇌 복제 데이터를 삭제한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엄마가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는 것은 윤서현의 삶을 옥죄는 굴레이기도 하니까요. '윤정이 팀장은 자유야'라는 외침은 '나는 자유야'와 동일한 말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윤서현 팀장의 이때까지의 삶이 엄마의 희생의 결과로 이루어진 삶이었다면, 지금 이 선택은 오롯이 그녀가 만들어낸 것이니까요.
결국 엄마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 엄마가 딸을 위해 희생했듯 딸이 엄마를 위해 희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엄마가 딸을 위하는 것이 (아무리 어려운 일을 해야 해도)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듯이, 딸이 엄마의 엄마가 되는 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거죠. 자연스럽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 싶습니다.
딸에 대한 기억이 다 지워진 A.I.이지만 떠나기 전 윤정이와 윤서현만이 아는 '행운의 부비부비'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자유를 찾아 떠난 A.I.와 총상을 입고 뒤에 남겨진 윤서현 팀장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꽃밭을 손잡고 뛰어다니는 해피 엔딩은 아니에요. '어, 이렇게 끝난다고?' 싶기도 했지만 이러한 열린 결말이 이들의 삶이, 그리고 우리의 삶이 계속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