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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LAXY IN EUROPE Feb 17. 2023

죽어가는 이의 내러티브

[소설] 산소리 - 가와바타 야스나리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에 이어 <산소리>를 읽었습니다. 그의 소설은 매우 묘사적이어서 마치 소설 속에 있는 것처럼 장면들이 눈앞에 떠오르면서도 등장인물의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사회적•통상적 규범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읽기 불편함도 있는데요. 특히 주인공 오가타 신고의 생각을 따라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오가타 신고

오가타 신고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입을 조금 벌리곤 어떤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뜻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다. ... (중략) ... 그는 아버지가 뭔가를 생각한다기보다 떠올리려고 한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산소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60이 넘은 나이로 점점 기억력도 떨어지고, 자신이 늙어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신고가 이 책의 주인공인데요. 속된 말로 좋은 시절 다 가고,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지루하고 의욕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입을 벌리고 멍한 듯 슬픈 듯한 표정’을 상상만 해도 무료해지네요.


안타깝게도 그는 젊을 때도 소위 잘 나가는 인사는 아니었던 듯해요. 사모해마지 않았던 여인이 죽자 그 마음을 여전히 품은 채 그녀의 동생과 결혼을 합니다. 혼인식에서 죽은 여인의 남편이자 동서의 눈치를 보느라 신부와 제대로 얘기조차 나누지 못하죠..

심지어 그 신부는 죽은 언닐 대신해 ‘잘생긴’ 형부의 아내가 되고 싶어 했었다니, 이 결혼 잘못돼도 한참 잘못돼 보입니다. 결국 이 먹구름은 두 아이를 낳고 시집장가보내는 동안 전혀 걷히지 못했습니다.


음울한 가정에 난 창(窓)

사정이 그렇다 보니 그는 육친(肉親)의 정(情)을 제대로 주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오히려 젊은 며느리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듯이 보이는데요.

신고에게 기쿠코는 음울한 가정에 난 창이었다. 육친이 신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 또한 뜻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게 되니, 그에게는 육친의 울적함이 더욱 덮쳐왔다. 그러나 젊은 며느리를 보면 안심이 되었다.

저는 그것이 TV 드라마를 보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젊고 예쁘고 착한 며느리를 보며 내가 그녀의 남자라면 바람도 피우지 않고, 술 먹고 인사불성이 되어 들어오지도 않으며, 중절 수술을 하게끔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죠.

음울한 가정에 난 창은 바로 텔레비전 스크린이 아닐까?

하지만 신고는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바람에 괴로워하는 며느리도, 마약중독 사위에게서 도망치다시피 친정에 돌아온 딸과 두 손주도 그저 바라보고 관찰하는 위치에 머무는데요. 아내 야스코의 지적이 참 날카롭습니다.

“당신은 기쿠코를 단지 귀여워할 뿐이지, 정작 중요한 일은 해결해주지 않잖아요. 후사코의 경우도 그렇잖수?”

이것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의 위치와 같지 않을까요? 등장인물을 보며 ‘나라면…’을 수없이 되뇌고 안타까워하고나 부러워하거나 화를 내는 거죠. 신고도 스스로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자식의 아내를 위해서 자식을 감각적으로 미워하는 것이 신고에게도 조금 이상했지만 자신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이나 현실에 대한 문제 해결 의식 없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시나리오 쓰기에만 전념하죠.

만일 신고가 야스코의 언니와 결혼했더라면 후사코 같은 딸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사토코 같은 손녀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의외로 신고는 옛날 사람이,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그리웠다. 예순셋이 되어서도, 이십 대에 죽은 그 사람이 역시나 그리웠다.

그리고 그의 시나리오는 사회적 규범과 상식을 넘어 점점 더 극한으로 치닫는 듯합니다.


죽어가는 이에 대한 연민

이러한 그의 생각들을 변태적이고 비도덕적이라 비난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상하게도 그를 이해하는 마음이 들었는데요. 신고가 아버지로서 또는 가장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채 자신의 늙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한 명의 연약한 인간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다한 꽃처럼 시들어가는 신고
꿈속의 신고에게는 사랑도 기쁨도 없었다. 음란한 꿈에 음란한 생각조차 없었다. 완전히 ‘뭐야, 시시하잖아’였다. 그리고 시시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 시시해져 버린 신고. 시든 꽃 같은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를 비난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그는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기보다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고 해야 더 맞지 않나 싶어요. 우리는 그의 ‘삶’이 아니라 ‘죽어감’을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산소리(山の音)

신고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말이죠. 친구들의 장례식과 병문안을 다니면서, 출퇴근을 하면서 그는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온갖 생각들이 연이어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갑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자 문득 신고에게 산소리가 들렸다. ... (중략) ... 밤이 되면 가마쿠라의 골짜기 깊숙한 곳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오곤 했기에, 순간 바닷소리인가도 의심했지만 역시 산소리였다. 아득한 바람 소리와 닮았지만 땅울림 같은 깊은 저력이 있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해서, 신고는 이명인가 싶어 머리를 흔들어보았다. 소리는 멎었다. 소리가 멎은 뒤에야 비로소 신고는 공포에 휩싸였다. 임종을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한이 났다.

그가 듣는 산소리는 머릿속에서 나는 이명(耳鳴)일 수도 멀리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를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이게 합니다. 우리가 가끔 나와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이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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