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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라 May 25. 2022

#3 국경도시 프쉐미시에서 만난 우크라이나의 첫 얼굴

폴란드에서의 10일

1. 특별한 땅 폴란드 (크라쿠프 쉰들러 박물관)


크라쿠프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나와 팀은 드디어 우리의 주요 목적지이자 최종 목적지로 향한다. 바로 우크라이나 국경이 보이는 도시 프쉐미시(Przemysl)이다. 크라쿠프에서는 기대했던 것만큼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서 조금 더 우크라이나와 가까워지는 도시에서는 난민들을 만날 수 있을거라는 기대와 동시에 가서 실질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란 걱정도 들었다.

 

두세 시간 차를 타고 가며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다. 그 전날 마침 쉰들러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곳에 다녀와서 폴란드, 특히 이 곳 크라쿠프에서 일어났던 1,2차 세계대전의 흔적들을 잠깐이나마 쫓아볼 수 있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와 <피아니스트>를 통해 홀로코스트를 보았던 게, 실제로 이 곳에는 역사의 일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그렇게 엄청난 증오와 학살이 같은 인간에게서 시작되어 자행되었다는 사실이 생소하기만 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혹은 여러 사람의)의 기록이다. 수용소 사람들은 생명과 죽음, 인간과 짐승 그 사이를 넘나들며 생을 유지해나간다(혹은 수많은 사람이 그러한 유지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서 사라졌다). 불과 한 세기 전에.. 나는 말로만 듣던 아우슈비츠가 폴란드에 있는 것인지도 몰랐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인권 관련 서적이나 논문들을 많이 읽어야 했었는데,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1년의 시간과 지금 이곳 폴란드까지 와서 직접 보고 느끼는 이 짧은 시간을 비교해보았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 또한 필요하고 가치 있지만, 뭐든 내가 직접 보고 느끼고 나의 체험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함을 느낀다. 아무리 많은 지식이 머릿속에 있어도 그것을 직접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분명 다르다. 다시 한번 내가 영국에 오게 되고, 지금은 폴란드까지 오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이곳을 통해 크라쿠프, 폴란드가 나치의 짓밟힘을 당했던 곳임을 보았다. 세계대전 당시에도 폴란드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폴란드는 우크라이나를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서는 나라다. 우리가 도우러 올 수 있는 곳도. 폴란드였고. 이 땅은 참 특별한 곳이다.

 

쉰들러 박물관. 오스카 쉰들러. 영화를 안봤다면 강추 강추 합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오스카 쉰들러의 에나멜 공장 정문 모습. 많은 이들을 생명으로 들여보낸 문이다…


2. 프쉐미시에 도착해서 만난 한 사람


프쉐미시 시내. 정교회처럼 보인다.


프쉐미시에 도착했다. 폴란드 음식을 파는 식당을 찾아 식사를 했다. 폴란드에서 유명한 음식인 것 같은데 우리나라의 물만두와 찐만두의 묘한 경계에 있는 듯한 피에로기(Pierogi)를 먹어봤다. 만두피는 메밀전분으로 만든 것 같았고 속은 꽉 차 있었다. 유럽 음식이라서 영국처럼 베이컨이나 파스타 같은 거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중앙아시아 음식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오른쪽에 있는 만두가 피에로기다. 나머지는 파스타, 샐러드..


그 다음 날 우리는 주일을 맞아 교회에 방문했다. 현재 폴란드는 국교가 없지만 85%에 달하는 가톨릭 중심의 국가이고 개신교는 아주 소수가 있다고 한다. 직접 그곳에서 들어보니 대놓고 박해하지는 않고 존중하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우호적인 것은 아니고, 개신교인들이 바깥에서 드러내어 활동을 하려고 하면 별로 반기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고. 감사하게도 리더 석이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에 가서 만나게 된 사역자를 통해 프쉐미시의 나자렛 교회라는 오순절교회의 목사님과 연결되었고 우리가 프쉐미시에 도착한 날이 주말이라 우리는 교회에 방문하게 되었다. 교회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예배당이 예배를 드리려는 교인들로 가득차 거의 앉을 자리가 없어 몇 성도들은 뒤에 서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찬양은 폴란드어였지만 대부분 아는 곡이었고 찬양팀은 대부분 젊은 폴란드인들로 기쁘게 찬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예배드리는 것은 언제나 마음에 감동을 준다. 예배는 언어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에 매이지 않고 순수하게 마음을 낼 수 있게 된다.


프쉐미시에 있는 나자렛 교회


예배가 끝나고 아래층에서 커피와 티, 그리고 맛있는 케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고팠던 레베카와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케이크를 먹었다. 그렇게 맛있는 케이크는 오랜만이었다. 교회에서 나눠주는 케이크라서 눈치껏 적당히 먹어야 하는데도 너무 맛있어서 레베카와 나는 번갈아 가면서 케이크를 가져와 나눠 먹었다. 많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우리 팀이 모여 앉아 있는데 우리의 옆에 어떤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머리는 듬성듬성 세어 있었고 어두운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고 계셨는데 그 모습이 흡사 수녀님의 복장 같으면서도 두건을 쓰고 있어 교회를 관리하시는 분이신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옆에 앉아 계시기에 말을 걸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분은 우크라이나에서 오셨다고 했다.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름은 로자. 그분이 내가 처음 만난 우크라이나 사람이었다. 우리는 동일하게 놀랐고 동일하게 마음이 아팠다. 번역기로 이것저것을 물어봤지만 잘 소통이 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하는 우크라이나어는 하나였다. 바로 웨일즈에서부터 연습해서 이들에게 불러주려고 준비했던 찬양. 이수수 슬라바(Isusu Slava, 예수님께 영광)라는 찬양이었다.


이바, 나, 그리고 레베카. 오른쪽이 로자 할머니.

우리는 핸드폰의 악보를 한 번, 그 분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보며 찬양을 불렀다.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우리의 서툰 우크라이나어 찬양을 들으시던 할머니는 이내 눈물을 쏟으셨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어로 그곳에 예수님의 평화와 행복과 사랑의 메세지가 담긴 노래를 했다. 우리가 옮겨 놓은 우크라이나가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녀는 무엇을 보았을까? 많은 공격으로 무너진 그녀의 고향 하르키우를 보았을까? 남은 가족들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것임은 분명해서, 우리는 그녀를 안아주고 같이 눈물 흘리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로자 할머니를 통해, 그녀의 눈물 너머로 전쟁을 어렴풋이나마 느꼈다. 그것이 나와 몇 명의 팀원들이 만나게 된 우크라이나의 얼굴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로자 할머니는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이곳으로 피난을 왔고, 우리가 떠나기 전날 쯤 그들도 독일으로 떠났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 난민들이 고향을 떠나 온 나라에 흩어지고 있을까? 집을 등지고 낯선 곳으로 향하는 모든 이들의 발걸음에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더불어 우리의 여정도 이렇게 한 발짝을 떼어 가고 있다. 이 날 이런 만남 이후 난민들을 위한 인도주의 구호센터를 방문해서 우리의 일을 찾고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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